나의 세상에게
2022. 10. 31. 02:29

 

 

 

나를 이야기할 때에,

너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어.

 

 

 

 

 

 

 

단 향이 깨어진 잠의 자리에 채워든다.

이는 설탕의 단 맛을 닮았다. 달큰하며 무겁고, 무게감이 살내음같은 포근함을 만들기도 하는, 그런 단 향. 그 향이 좋아 고개를 움직여 쫓는다. 이 속에서 꿈지럭거리는 몸짓이 만들어지고, 몸을 감싼 이불은 사부작 작게 소리를 냈으며 품안에 존재하는 온기가 가슴팍을 일정하게 덥혔다. 깨어진 잠으로 되찾는 감각은 감긴 눈꺼풀 위로 덮여오는 햇살을 알아차린다. 단 향을 찾아 움직였는데 그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포근한 이불, 햇살, 품안의 온기, 색색이는 숨소리, 가슴팍을 일정하게 덥혀오는 숨결. 찾아내는 것은 세상의 단편들이고 이것이 더해질 때마다 폐부를 파고드는 향은 더 짙어진다. 더 달게, 더 포근하게, 더 따듯하게, 더 애틋하게. 그리하여 마침내, 쫓은 고개로 더없이 깊어진 단 향이 코끝에 닿고, 향을 빚어내는 하얗고 간지러운 감촉에 입술이 부딪히면,

 

"루크."

 

모든 아침을 이뤄준, 그리하여 세상이 된 이를 불러서.

 

눈꺼풀은 입술에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닿을 적부터 절로 들어올려진다. 그리하여 담기는

 

하얗고,

하얗고,

하얀, 저의 빛.

 

이것이 저를 이루는 세상의 색이다.

 

덜어진 잠만큼 눈꺼풀은 무게를 잃고 쉬이 떠지는데, 심장은 들어찬 단 향의 무게를 고스란히 삼킨 양 무겁게 울린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일정한 울림을 듣다보면 문득 드는 사소한 생각이 있다.

 

심장 속에 살고 있는 작은 토끼. 저의 심장을 매순간 간지럽게 만드는 것. 입술에 닿은 감촉에 살결도, 심장도 모두 간지러워서 입꼬리의 호선은 완만해질 줄을 몰랐다. 

 

"작은 토끼는 잠이 없나 봐, 루크.

내 큰 토끼는 계속 자고 있는데."

 

조용히 속삭인 말은 혼잣말처럼 상대의 귀에 제대로 닿지 못한 채 흐려진다. 그저 귀에 닿는 속삭임이 간지러웠는지, 응, 작은 잠투정과 함께 품으로 파고드는 온기만 더 확연해진다. 제 가슴팍에 닿는 숨결이 더 뜨끈해졌다는 것이 차이다. 한없이 잠에 약한 투정이, 그 속에서 품으로 파고들어오는 어리광이 좋아서 단잠을 깨우며 재촉하던 어린아이는 잠을 구경하는 즐거움을 아는 어른으로 자란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의 사랑스러움을 아는 연인이 되고, 그를 지키고 보호해주고 싶단 욕심을 가지는 한 사내가 되어서.

 

"있잖아, 루크."

 

웃음이 번져든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빛이 너무도 눈이 부셔서, 달아서, 애틋해서, 좋아서. 고개를 묻고 보드라운 머리카락 사이를 유영하듯 가벼이 흔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루크가 잘 때에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

 

제 사랑을 이야기했다.

 

 

 

 

 

 

 

 

루크 윈스턴,

키아라,

레드.

 

 

제 세상은 가진 이름이 많다.

 

그리고 가진 이름만큼 제게 가져간 의미도 다양하다. 그는 제게 아주 많은 것을 독식한 사람이다. 애정 하나만 갖고 살아가고 싶어한 겁쟁이, 그런 저임에도 아주 많은 걸 가져가버려서, 그를 이야기할 때엔 하나의 단어로만 정의해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뉘어진 이름들을 이야기할 때엔 아주 사소한 처음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만다.

 

제 세상은 첫 만남서부터 제게 의미를 가졌다. 

 

“내 베개 안 보고 싶은 사람!”

 

친구들에 대한 개구진 질문으로 가득 쓰인 시험지가 있었다. 각 친구들마다 문제가 늘어져있고, 노엘은 베개 안에 이것을 넣고 다닌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일까. 제 문제도 재미있기에 베개를 번쩍 들어 친구들을 불렀다. 어떤 말장난으로 헷갈리게 해볼까, 장난을 쳐볼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꺼낸 말인데 수많은 답 속 들려온 하나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남는다.

 

“혹시 폭탄이라던가...”

 

들리는 답변은 퍽 개구져서, 어라. 한껏 기대와 함께 개구진 질문을 한 이를 바라보게 된다. 부스스한 하얀 머리카락, 하얀 피부, 온통 하얗기만 한 친구의 눈이 까맣게 반짝이는 게 퍽 인상적이었다. 온통 하얗던 것은 그 눈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나 싶어지기도 했고 보드랍고 작은 솜뭉치, 어린 털짐승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짓궂은 답변과 어울려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가진 시험지의 문제처럼.

 

“혁명의 붉은색을 좋아할 것 같은 추측인걸?”

 

키아라가 좋아하지 않는 색을 모두 고르시오. 무난한 문제 아래 쓰여있는 선택지는 누가봐도 한껏 장난을 담아 써놓은 예시였기에 마음에 들었다. 혁명의 붉은색. 그에 부러 엉뚱하게 말을 건네면,

 

“그 베개 붉은색이 되는 거, 좀 멋있을 것 같지 않아?”

 

조금도 지지 않고 엉뚱하게 맞춰주는 답변에, 어느 순간 어린 꼬마 둘은 혁명가가 되었다.

 

그렇게 베개를 꾸미겠다며 손을 잡고 베개에 비즈를 달러 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를 꽤 좋아해 헤지도록 끌고 다녔고, 비즈를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그가 들고 와 수선해주었다. 보물찾기처럼 잃은 비즈를 찾아다니다가 그러는 중에도 또 잃어버린 비즈를 생각하면, 바보같았으며 즐거웠고, 재미있었으며 그 기억이 절 간지럽혔다. 소소한 장난 속에 하얀빛으로 지어지는 웃음이 좋다 생각했다. 밝고, 맑고, 즐거움이 솔직히 드러나서.

 

좋으니 계속 보게 되고

계속 보다보면 역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짠, 선물!”

 

그는 선물 주는 것을 좋아한다. 받는 이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진 선물을 보면 주변 사람들을 세심히 보는 시선을 알 수 밖에 없다. 그걸 보며 확신했다. 친구들을 좋아하니 같이 지내면 즐겁겠다. 그 성정이 좋고 타인을 보고 만드는 선물들이 마음에 들었으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손을, 무언가를 만들고자 빛내는 눈을, 만들기 위해 머릿속에 또다른 공방을 차려 고심하는 얼굴을 보게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보다보면 어느덧 새로운 궁금증이 또 올라와서,

 

주변에 애정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이가 만드는 작품은 어떨까.

그가 보는 세상은 어떻게 작품에 담겨들까.

 

어느 순간 궁금해져서, 이젠 선물이 아닌 작품을 만드는 과정까지 보여달라는 말과 함께 그를 쫓았다.

 

그는 저의 친애다.

 

 

“레드!”

“응, 옐로.”

 

어린 장난으로 시작된 비밀스러운 혁명은 흐려지지도 못한 채 이어져 애칭이 된다. 혁명이니 레드다, 하고 붙인 애칭에 그럼 같이 색으로 애칭을 주겠다는 말과이 들리고, 그렇게 노엘의 세례명을 말장난 해 만든 옐로란 애칭이 제게 쥐어진다.

 

서로의 색에 맞지도 않아 비밀 암호마냥 지어진 애칭은 아이러니하게도 의미깊은 색상이 되어버린다. 혁명을 증명하는 팬던트 색상이 되고, 팬던트에 엮은 서로의 탄생화 색을 쏙 빼닮아서. 좋아한 적 없는 도서관에 담요와 베개를 두고 간식 바구니까지 놓고 살게 된 건 둘이서 큰 의미도 없이 갖고 있는 혁명이란 이름이 좋아서였다. 그렇게 무엇도 하지 않은 채 이름만 존재하는 혁명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서로의 탄생화, 태어난 이들을 축복한다는 꽃이 비밀을 담은 붉은 보석을 엮어내는 중에,

 

“레드.”

 

상대의 눈도 그와 같이도 붉어졌다.

 

“어쩌다보니, 눈색도 붉어져버렸네.”

 

멋쩍게 눈가를 만지는 손 끝에 시선이 닿는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의 기분은.

 

온전히 눈을 바라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붉은빛 대신 손끝에 시선을 뒀다. 그 눈이 붉어진 것은 레드라는 애칭을 지어준 제 탓인가 싶기도 했고, 그에게서 박탈된 신의 사랑과 타락의 증표가 너무도 붉어 부르는 애칭을 여전히 입에 담아도 되는지 고민되기도 했다. 타락을 자각시키고 싶지 않아서 하나 둘 지어준 애칭인데 그에게는 이것이 제 배려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오르는 감정은 비단 그것으로만 표현될 수가 없어서.

 

신의 사랑을 박탈당하고 세례명조차 스스로 거부하게 되는 이들을 볼 때 빚어지는 감정은 쓰리다. 선연토록 쓰린데 그가 제게 주는 감정은 더 짙었다. 가엾이도 죽은 친구들을 보았을 때보다 더 짙은 안타까움이 남는다. 그건 그의 죽음을 모조리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나는... ... 레드를 이해해.”

 

비겁한 위선자, 애정만 담는 겁쟁이와 다른 최선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탁은 절대적이나 그를 이루고 싶지 않다. 대신할 것을 바쳐보겠다 어린 생각으로 굴었던 노력이 있으나 이는 부질없는 것이 된다. 제물이 신의 곁에서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타락해 돌아오길 바라는 저는 무엇보다 모순되었을텐데, 아이러니하게도 모순된 건 저 뿐만이 아니다. 신이 종용했으니 살인은 죄악이 아니 된 것만큼 기괴한 것이 없다.

 

살인자가 된 친구들은 원망할 수 없고, 죽음에 가진 슬픔은 타락할 지언정 살아돌아오는 이들을 알아 부질없게 됐으니 품는 감정도 우스운 꼴 밖에 되지 않는다. 모순 속에 저는 사라지고 흐려져서, 모순적인 세상에 저는 적응할 수가 없어서 차라리 외면하고 제 애정만 말하기로 했다. 그게 제가 내린 결론이고 결심이다. 그렇게 비겁자가 되고, 겁쟁이가 되고, 그러면서도 이게 최선이라 자위 했는데,

 

앞의 이는 죽은 친구들이 신의 곁으로 온전히 가길 바라 도전자를 숨겨낸다. 도전자 대신 무작위로 죽을 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의도는 성공했을 테다. 설령 뒤로는 시체를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다고 해도, 적어도 외면 속에서 신탁과 시련에 대해 그 어떤 말도 얹지 않은 채 애정만 이야기하는 저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 생각해서,

 

겁쟁이와 달리 노력한 최선이 좋았고, 그 결과가 뜻대로 나오지 못했음이 안타까웠고, 끝내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제물도, 도전자도 아니게 된 채로 내놓게 되어버린 이가 슬펐다.

 

그러면서도 제가 미처 보지 못한 길을 보여주는 빛이 환해서, 그대로 따라 향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레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했다 생각하고 있어.

나는 네가 돌아와서 기뻐, 레드.”

 

그는 저의 이기적인 동경이다.

 

 

 

혁명이라는 단어 하나로 묶여 시작되던 관계는 순탄하게 나아간다. 장장 10여 년 간 이어진 관계는 익숙하고 당연하게 자리한다. 친애로 이어져 이기적인 동경으로 관계에 대한 애정을 낳고, 계속 지속되길 바라는 소망을 빚었다. 그러니 먼 훗날의 이가 와서 해주는 대화가 그저 기뻤다.

 

“미래 이야기는 안 하는게 좋겠지만,

혁명... ...은 계속 진행되고 있으니까.”

 

매점의 디저트는 먼 시간선 뒤의 사람을 불러온다. 그가 직접 이야기해주는 확고한 미래가 기뻤고, 만족스러웠고, 더 욕심이 난다. 10년, 30년, 쭉. 그렇게 말하는 제게 약속이라며 새끼 손가락을 걸어주던 이를 문득 떠올려보면,

 

루크, 혁명 뒤의 침묵은 이런 의미였어?

문득 품에서 곤히 잠든 이가 다시금 달게만 느껴져서, 들리지도 못할 말을 작게 속삭였다.

 

먼 훗날의 이는 귀여운 인형을 잔뜩 만들어주고 간다. 오르는 기쁨은 과도한 열기를 빚고, 열이 오르도록 좋아한 저는 이를 삭히며 기쁨을 내려앉힌다. 나란히 만들어진 인형을 함께 안고서, 어딘가 고장난 것 같은 생각을 하며 나란히 만들어진 인형을 보면.

 

그 순간 보이는 인형들이 너무도 좋은 것은 그저, 친구에게서 의미있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닐테다.

 

훗날이 약속된 관계는 과거에 묻어야할 가족에 대한 그리움까지 삼켜준다. 모두가 함께, 서로 해치지 않고 사랑하고  즐겁기를 바라는데 신탁이 존재하는 이곳은 누가 도전자가 될 지 모르고 누가 살해되어 시신으로 발견될지 알 수가 없는 곳이다. 그에 애정만을 입에 담으면서도, 제가 주는 애정에 대해 오롯한 기쁨과 행복이 오지 않을 것임을 의심하고 체념하게 되는데 그는 온전히 저의 애정을 말해도 되는 이가 된다. 거기서부터 오는 차이가 저를 안도하게 한다. 온 진심을 다하게 했다.

 

가족을 그리워한 것은 온전히 사랑해도 되는 존재를 그리워했었던 것임을, 저는 그로써 깨닫는다.

애정 외에 지우고 외면해, 종내엔 스스로도 알 수 없게된 수많은 감정의 이름을 하나씩 찾았다.

 

그는 저의 위안이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모든 것이 밝혀져 신탁조차도 삶을 기만한 거짓임이 드러난다. 그간의 괴로움은 분명 존재하는데 본래라면 있어선 안될 고통임을 깨달았다. 그 사실이 벅차단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을 등돌린 채 자고 싶다 생각했다. 그렇게 영영, 어쩌면 끝나지 않을 잠을 자도 좋겠다고.

 

그럼에도 눈을 감는 대신 주변을 살피면, 제 삶에 가장 바란 것들만을 남은 현실이 저를 반겼다.

 

떠나지 말고 모두가 함께 있기를 바란 비겁한 애정의 바람을 이뤄주듯, 떠나는 이가 있을지언정 남는 이들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기쁘게도 남아주겠다는 선택을 한 이들이 있으니 그 곁을 지키려 남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외로이 두고 싶지 않아서, 다정한 선택을 해준 이들이 좋아서, 제 삶을 다 걸어 그들을 사랑하고 싶어서.

 

그러니 곁에 덩달아 남는다 이야기를 하고 나면 제가 서 있는 곳은 한결같은 그곳이다. 오랜 시간동안 친구들과 함께 자라온 장소. 익숙한, 그러나 더 이상 끔찍하지 못할 학원에 덩그러니 서 앞으로 무엇을 해볼까, 그를 생각했다.

 

먼 훗날, 남은 이들조차도 모두 스러져 죽는 정말 먼 훗날, 긴 수명의 끝을 맞이한 후 영원을 살아가는 재앙 된 친구들이 나갈 날이 올지 모르겠다 생각은 하면서도, 당장의 그 순간이 무서워 멈춰있고 싶지 않아 더 많은 애정을 줘야지. 그리 각오한 채로. 차라리 이 애정을 어떻게 표현해볼지를 고민했다. 그때에

 

계속 같이 있자. 기쁜 선택을 해준 저의 안식이 다가왔고

마지막까지 그러할게. 저는 끝이 있는 약속을 했다.

 

“어떡하지? 나에게는 마지막이 없어서 영원히인데.”

 

그리고 그 때에 들리는 상대의 답이.

 

제게 바라는 답이 무엇임을 알 수가 없다. 죽어 눈이 붉어진 이는 재앙으로 영원히 살아가는데 저는 죽어 돌아온 자가 아니라 언젠가 이 삶의 끝을 맞이할 것이라서. 이는 노력으로 될 것이 아님을 모를 이가 아니라 저는 되물었다.

 

“어떻게 할거야? 내가 영원히를 못 산다면.”

 

그리고 이어 들린 말은,

 

“기다려도 될까? 네가 다시 돌아오는 날을.

너무... ... 욕심이려나?”

 

이 말을 들을 적의 기분은, 지금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저는 제 삶에 이루고 싶었던 것이 애정만이라서, 가졌던 수많은 감정에 대해 제대로 이름을 붙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친구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슬픔이라 표현하는 것이 우습고, 친구를 죽인 친구들에 대해 불쑥 튀어나오는 원망은 가져선 안될 것이니 삭히고 어그러트려야함이 옳다. 가엾게도 죄를 지으라 내몰려진 이들에게 가져야할 것은 안타까움이 최선이나 저는 방관자이니 그조차도 이기적인 기만에 가깝다. 그러니 자격없이 품을 수 있는 것은 애정이고, 애정 뿐이라서. 그리고 그것이 제가 가장 바란 것이기도 했어서 저는 애정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니 저의 모든 감정을 삼키고 품은 애정의 대상들은 당연히 주위의 친구들이고, 그들에게 품은 애정은 너무도 커져 하나의 집착처럼 변모한다. 같이 있자. 곁에 있어 줘. 친구란 소유할 수 없으니 그를 닮은 인형들을 갖고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줄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말했듯 친구란 제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젠가의 헤어짐을 저는 이미 알고 있다. 쥐인형은 저의 변모하는 애정의 한 형태기도 했지만 떠나간 이들을 그리워할 수 있는 사진과도 같은 것이라 이별은 언제나 제가 각오하고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속이 쓰려도 이는 당연한 것이니 저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죽어 다시 태어날 저에 대해서도 생각해 이야기를 한다.

 

가장 욕심쟁이에게 이야기해주는, 그 욕심많은 말에.

 

“돌아올게. 이곳으로, 영원히!” 

 

저의 답은 정해져있고,

 

“그럼 약속이야.

안 찾아오면 내가 찾으러 나가버릴지도 모르니까,

지치기 전에 와 줘.”

 

그리하여 그는 저의, 욕심이자 미래이며, 영원이 됐다.

 

 

저의 미래와 먼 훗날의 삶까지, 몇 번이고 이어질지 모르는 새로운 삶까지 모두 약속했으니 그에 맞춰 사고한다.제 평생에 가장 중요하게 자리잡은 이는 오랜 시간 둘만의 비밀이고 여전하 이름이 남은 혁명을 함께해줄 이고, 그는 이제 저의 영원을 함께 지내주기로 했으니 가장 우선해야할 이가 된다. 그러니 그 약속과 함께에 제 삶에 포기하는 것들이 생겨난다.

 

저의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까지 잡아먹었듯이,

영원을 함께해줄 고마운 이를 위해 내어주는 것은 앞으로 있을 저의 인연들이다.

 

내거는 약속은 분명 빠르게 나왔으나 그렇다해서 허투루 꺼냈다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대보다 더 소중한 이는 생길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죽어 다시 태어나 이후에 가지는 가족들도 상대보다 더 값지지는 못할 것이고, 공평하게 사랑한 친구들 중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생겨난다. 그보다 더 애정을 가질 존재가 생겨선 안되니 제 삶에 생각해본 적 없던 애인이란 관계도 쉬이 단념했다. 굳이 그러한 형태의 관계가 존재치 않는다해도, 제 영원을 함께해 줄 이가 있으니 단념은 아쉽지도 않게 완성된다.

 

기쁜 약속에 맞춰 저도 내려놓는 것이 있는 것 뿐이다.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가지 못할 그리운 가족들, 옛 친구들, 훗날 죽어 다시 태어나거든 만나게 될 새로운 인연들, 그때의 새로운 가족들, 우정이 아닌 사랑의 형태의 관계들도, 모두.

 

물론,

혹시라도 아주 사소하게,

그 관계의 형태들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면,


“레드, 

정말 키스하면 저릿저릿한 기분이 들까?”


차라리 상대에게 그를 묻게 된다.

 

도서관에 익숙하게 자리하고, 언젠가의 팬던트를 만들던 때처럼 담요와 베개를 놓고 간식 바구니까지 둔 채 책을 읽다보면 올라오는 궁금증은 사소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지는 애정의 형태와, 그리고 그것의 크기가 서로 같아서 이뤄지는 사랑을 보면 그 순간들이 멋지고 예쁘다 생각하는데 진정 좋아하는 이와 연인으로써 이루는 스킨쉽을 볼 때마다 그것이 진정 달짝한 것이 될 수 있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라지만,

스킨쉽 자체가 저릿한 기분을 만들 수 있는건가?

 

물론 친구를 끌어안고, 그에 얼굴을 묻고 부빌 때에 오는 안정감과 즐거움은 알지만 저릿한 감각은 저로썬 예상할 수 없는 것이라. 그런 사소한 궁금증이 불쑥 나오고, 글쎄. 상대는 모르겠다는 답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를 듣고나면 툭 튀어나오고 마는 건,


“있잖아.

우리 한 번 해볼래?”

 


이때 정말 궁금했기만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이제야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잠든 이에게 비밀처럼 속삭였다.

아마도 아닌 것 같아.

 

나랑 해도 괜찮아? 오히려 상대는 기겁해 묻고

루크라서 괜찮은건데? 그외의 모든 인연을 단념한 저는 당연하게 답을 했다.

 

사소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것은 상대의 허락에 맞춰 이뤄진다. 긴장해 눈을 감는 이를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어 머뭇거리게 되다가도, 그럼에도 제 호기심은 남았고 제가 이를 할 기회는 지금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고개는 그대로 앞으로 숙여져 톡, 가볍게 입술끼리 맞닿았다 떨어진다. 그저 스쳐 닿듯이 맞추고나면 입맞춤은 기대보다 더 별 것 없고, 끌어안고 부비는 스킨쉽보다 오히려 못한 기분이라 의문 속에 한 번더 입술을 꾸욱 내리눌러봤다. 그럼에도 무엇이 특별한지 알 수가 없단 생각에 고개를 떼려하면,

 

. 채 떨어지기도 전에 상대의 입술이 벌어져 제 입술을 입술끼리 부비듯 핥아낸다.

 

그때 등허리서부터 타고 올라온, 감각들은. 

 

“저릿해? 나는 긴장해서 잘 모르겠어.”

 

숨이 막히도록 조여오는 전율에 호기심은 이미 풀려들었는데, 제게 그를 알려준 이는 모르겠다 하는 말에 불쑥 올라오는 생각은 스스로 무어라 정의할 수가 없다. 이를 알려주고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저 혼자만 이를 느꼈음이 싫기도 했으며,

 

“그럼, 또 할래?” 

 

그리고 또, 다시 이를 느껴보고도 싶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갈구하듯 몇 번이고 입술을 부비던 것은 저였고,

영원히 이어지는 날들동안 두 번은 없을 것이 너무 아쉬워서.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그와 저는 변화되어선 안될 관계라 생각했다.

 

“있잖아, 하얀 꽃을 가지고 와서 갈색 흙 위에 심음 뭔지 알아?

우리 머리색이야! 같이 탄생화 옆에 두면 좋겠지.”

 

하얀 숲에서 본 광경이 아름다워서, 언젠가 그 꽃을 가지고 와 학원에 심어보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대로 정신없이 잊었던 것을 넘치는 시간과 여유 속에, 다시 하나 둘 이뤄내기 위해 걸음을 향하던 중에 꺼낸 이야기는 사소했고,

 

“흰꽃은 흙이 없으면 금방 죽어버리니까, 옆에 꼭 붙어있어야겠다.

하얀꽃은 생각보다 욕심이 많아서, 한눈 팔면 시들거릴지 모르는데

흙 위에는 하얀 꽃 말고 다른 꽃들도 많이 피었잖아.”

 

사소했으나 그 속에 담긴 말은 결코 가볍지 못했다.

 

욕심을 이야기하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저를 기껍게 만들었다. 먼저 욕심내 말하는 관계가 아니라, 타인이 욕심내어주는 관계 아에 오는 기분은 스스로도 낯선 기쁨이다. 오로지 그만이 제게 채워줄 수 있는 기쁨이라서, 그 욕심에 대한 말을 고심하다 결국 속을 꺼내들었다.

 

“언젠가 꽃들이 모두 떠나고 흙만 남겨질 것을 알아.

나는, 다 떠나도 흰꽃만은 남았으면 좋겠어.

아주 긴 시간동안 이곳을 같이 살아가줄 사람을 정하라고 하면 레드인게 좋다는 거야.”

 

이처럼 아주 긴 시간을 이미 약속해버려서, 긴 시간 함께 지난 날들처럼 지내오겠다는 기쁜 약속이 있어서, 저는 이 관계가 변치 않고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바랐다. 

 

루크.

나는 이 완전한 관계가 변한다면,

언젠가 그 끝에 이별이 생길 것만 같았어.

 

함께 무언가를 만들고, 저의 수많은 이름을 가져간 이의 곁에서, 애정 외의 다른 감정을 조금씩 되찾고 되풀이 하면서. 

 

“제이드 형아.”


그래서 불러줬던 호칭이 좋다가도,

 

“좋은데... ... 미묘해.”

 

문득 너무도 낯설어서, 좋은 것과 반응해야할 것을 알 수 없어 멈추게 된다. 이 관계가 좋으니까, 우리는 평생토록 이러한 관계로써 살아갈테니까. 서로 잘 맞는 친구로써 영원을 보낼테니까. 그리하여 결정된 영원일테니 이곳에서 변화는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형아, 불리는 호칭이 간지럽고 좋다 생각하면서도 관계를 변화시킬 것이란 생각에 불현듯 무섭기도 했는데.

 

“입 맞추는 것도 이렇게 기분 좋은데,

다른 것도 궁금하지 않아?” 


그간의 두려움을 한 순간에 집어삼켜든 이가 하는 말에, 이것이 그간의 형태와 다름을 알면서도 홀린 듯 따라갔다.

 

사실은 말이야,

아주 오랫동안 참은 욕심이 터져나온 것에 가까워.

 

좋고, 기쁘고, 변화하는 형태가 기껍다가도 가지는 불안과 두려움에 외면하던 것인데,

먼저 맞춰버린 입술은 제 스스로 넘어서버린 선이고 웅크려 숨죽이던 욕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조리 잡아채버린다.

 

그렇게 도달한 방, 어린시절의 추억과 장난꾸러기들의 아지트로 자리하던 방에서, 그 옛날과 다른 형태로써 들어가 입을 맞추고나면,

 

서로의 몸을 더듬는 손길이 온전히 끝을 향해 나아가기 전에 저는 마침내,

 

“있잖아, 루크.
나는 루크랑 어떤 식으로든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좋다 생각했어.”


영원토록 이어지길 바란 것은 서로가 가진 관계성이 아니라,

그저 상대가 곁에 있길 바랐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건 친구 말고, 다른 이름으로 하고 싶어.
애인으로 영원을 줘.”

 

그리하여 가장 크게 자리해, 너무 커 스스로도 모르게 숨겨버린 욕심을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욕심 끝에 제가 얻어낸 것은,

 

잠 대신 채워오는 단 향,

당연하게 입맞추게 되는 달짝함,

품으로 당겨 제가 소유하는 온기. 


“루크”

 

품안에 자리한 상대를, 온기를, 단 향을 불렀다.

 

“욕심부려 다행이라 생각해.”


속삭이는 말은 제 욕심에 대한 말이기도 하고, 가진 욕심을 이야기해준 상대의 말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애인하자, 애인으로 할래. 그렇게 끝나는 말에 기꺼이 수락의 말을 한 이는, 제 속과 똑같은 말을 꺼냈다.

 

함께하는 시간들이 소중해서,

욕심으로 모든 걸 잃게 될까 무서웠어.

 

결국 겁많은 욕심쟁이 둘이서, 그럼에도 온전히 숨기지 못한 채 서로에게 품어낸 욕심의 끝에 낸 결론이 마냥 달아,


“루크가 말하는대로 내 전부를 줄게. 영원을 줄게. 더 달라고 하면 더 줄게.

그러니까 더 욕심내 줘.

 

나에게,
루크의 욕심을 줘.

 

처음 내어주고 내어받은 영원도 분명 한없이 저를 기쁘게 했었는데,

애인으로 받아낸 영원은 그와 비교조차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다 루크에게 줄테니까, 계속 내 옆에서 받아가 줘.
그렇게 루크의 영원을 줘. ”

 

 

그러니 욕심은 그에서 멈춰야하는데 아니러니하게도 한 번 크기를 키운 것은 결코 줄어들 일 없이 제 부피만 키워서, 잠이 든 이의 하얀빛에 입을 댄 채 하염없이,

 

“그래서 매일 눈을 떴을 때에 내 세상이,

하앴으면 좋겠어.”

 

가장 큰 욕심을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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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가씨
    2022. 10. 1. 00:29



    소리를 삼키는 적막은 제 숨조차 가져간다.

    몸에 무겁게 자리잡는 것은 속절없이 제 의식을 고꾸러트리던 잠과는 또다른 것이라, 바닥을 딛고 있음에도 저는 한없이 추락한다. 내려앉는다. 잠겨든다. 제 몸을 감싸는 것은 서늘한 공기건만 숨은 이다지도 부족해 손으로 목을 감쌌다. 숨길이 제 목구멍을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도 없건만 여기로부터 손을 뗄 수가 없다.

    또 다시, 시련이다.
    그 사실이 숨이 막혔다.

     

    “아가씨.”

     

    뭉개지는 발음으로 부른 애칭이 속쓰리다. 일찍이 지었던 애칭은 다행이며 동시에 그렇기에 제 기분을 한층 더 역하게 만든다. 저의 애칭은 애정이고, 놀이였으며, 배려였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모순이기도 했다.

     

    죽어 돌아온 이에게 타락의 사실을 실감하게 해주고 싶지 않아서, 저는 애칭을 지어주려 노력했다. 죽어 돌아왔을 때에 달라지는 호칭은, 쓸 수 없는 세례명은 타락한 자의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누를 것이니까. 저는 제 소중한 사람들이 괴로워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살로메.”


    그러니 이것은 이제 더 이상 부르지 못할 호칭.

     

    “살로메.”

     

    마지막으로 입에 담을 수 있는 세례명.


    “살로메.”


    소중한 이가 박탈당한 신의 사랑.

    저의 애정과 배려는 모순이다. 그들이 살아 곁에 남길 바라고, 행복하길 바라고, 아프지 않길 바라는데 아이러니하게 친구들의 죽음을 염두한 애칭을 지어준다. 그리고 이것이 저의 최선이다. 신탁과 시련에 대한 저의 최선. 저의 부질없는 공물은 헛짓이었음이 이미 5년 전에 밝혀졌고, 그에 할 수 있는 것은 이에 순응하는 것 뿐이다. 순응하지 않는다한들 할 수 있는게 없으므로. 

    한때엔 이 시련과 죽음이 끔찍히도 싫어

    누구도 이를 이룰 수 없게, 다 재워버리고 싶기도 했는데,

     

    그것이 결국 신이 바란 제물과 무엇이 다를까 싶어졌다.

     

    움직이지 않고, 종일 잠만 자고, 사고도 할 수 없이 누워있는 친구들을 볼 자신도 없었다.

    제단 위에 올려진 이의 시신조차 이렇게 끔찍하고 슬픈데,

    제 손으로 만든 아주 긴 잠은 더 끔찍할 것이라서.

     

    그러니 남는건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무지렁이 하나 뿐이다.


    “... ...아가씨.”


    이제 의미없을 세례명은 더 이상 입에 담지 않는다. 제 무력함을 인정하고나면 숨이라도 쉬어보기 위해 목을 감싸던 손마저 힘없이 떨궈진다. 시선조차 아래로 추락하고, 마침내 모든 것이 가라앉아지는 자리에 저는 홀로 서, 


    “네가 돌아오면 좋겠어.”


    이것은 신의 시련. 도전자가 시련에 성공한다면 신의 곁에서 사랑 받을 것이다. 그동안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것이긴하나 차라리 그의 행복을 빌어 말한다면, 저는 도전자가 성공하길 바라야할 것이다. 설령 누군가 그 대신 목숨을 내놓아야한다 하더라도. 제물 된 이가 받을 사랑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하지만 이미 말로 꺼낸 이기심으로 보였듯,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이미 너무 겁쟁이라, 친구들이 죽는게 무서워.
    슬프고 괴로워. 불안해, 아가씨.”


    겁쟁이. 언젠가 그가 했던 말 그대로 저는 너무도 겁이 많아서,


    “이 죽음에 나도 익숙해질까 봐, 슬퍼지지 않을까 봐.

    돌아오게 될 거라고 안일해질 것 같고,

    그리고 정말 어느 순간엔, 친구들이 돌아오지 않게 될까 봐. ”


    이기적인 배려로 지은 애칭은,
    죽었어도 다시 곁에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해.


    돌아오지 않는 죽음은... ... 너무 무서워.


    결혼하지 마, 떠나지 마, 같이 있어. 언젠가의 고집처럼 입을 열어


    “미안해, 그런데... ... 다시 돌아와 줘.”


    결국 무엇도 하지 않는 방관자에서 안식마저 방해하는 자가 되어,


    “... ...떠나지 마... ...”


    떠나간 이에게 이기심을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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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르소스
    2022. 9. 10. 03:19





    앞으로 남은 곰은 몇 마리?

     





    몸이 지독히도 무겁다.

    온몸이 물에 젖도록 놀았을 때조차 이처럼 무겁질 못했다. 졸려 쓰러져 잘 때의 눈꺼풀만큼 무거운 것이 없다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게 되었다. 처음으로 감당해보는 오롯한 슬픔의 무게는 터무니없어서, 이리저리 뛰다 온 것도 아니면서 입을 벌려 부족한 숨을 몇 번이고 폐부 깊숙이 채워냈다.

    제가 서 있는 곳은 죽은 이의 방 앞이다.


    잘자, 노엘.
    문 꼭 잠그고 자라!


    이 목소리가 마지막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는 이제 꼬박 하루가 다 되어간다. 그리고 이제 이는 수없이 늘어날테다. 이틀로, 사흘로, 나흘로. 저는 숫자 하나만은 잘 세서 이것이 얼마나 끝도 없이 이어질지 알아차렸다.

    문은 네가 잠갔어야했어. 기숙사 너머에서 무엇이 발견되었고, 어떻게 그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그가 말했던 말의 의도를 고스란히 되돌렸다. 왜 너는 문을 잠그지 않았어? 당장 이 기숙사 문이 잠겼는지, 열렸는지도 모르지만 말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 시련에 도전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계속 경계하고 제물이 되지 않도록 했어야지.


    애꿎은 원망과 탓이 가선 안될 사람에게 향해든다. 그를 알아 베개를 끌어안고 못된 말들을 지워냈다. 베개는 그리운 이의 손길이 닿았었던 것인데도, 잡다한 것을 고스란히 품어내는 것과 달리 그 온기만은 부질없이 흘려보내버렸다. 마치 주인 잃은 방처럼. 그 삶이 끊겨버린 시신처럼. 

    그것이 못내 억울하고,
    그것이 못내 소름끼쳤다.

    돋는 소름에 베개는 오래 안겨있지도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진다. 시신을 닮은 것이 바닥에 누워있으니 그를 두고 갈 수가 없어진다. 그러니 떠나가지 못한 걸음은 뗄 수 없는 것이고, 낮아진 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은 허물어지듯 아래로 기우는 법이다. 아무렇게나 주저앉고 나면 베개 옆에서 몸을 말고, 열 생각 없는 문을 마주한 채,


    “티르소스.”


    이제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부를 수 있을까 싶은 이름을 불러서,


    “노래 해줄까?”


    노래와 춤을 구경하길 좋아한 이에게 작은 위안을 건네고자 했다. 


    "내가 노래하고 춤 출테니까 티르소스도 같이 추기야!"


    앞에서 노래하고 춤춰달라, 하는 이의 손을 잡고 멋대로 추던 춤이 생생하다. 


    “곰 스무마리 학원에 있어!
    티르곰 노엘곰 친구곰~ 티르곰은.. ... 뭐하지?”

    “티르곰은 심심해~ 노엘곰도 심심해~ 
    친구곰은 아무도안놀아줘!”


    멋대로 개사한 동요는 제 입에서 어거지로 시작돼 상대의 입으로 멋지게 마무리가 된다. 엉? 어엉? 잉? 이상하게 소리를 내던 것과 달리 상대는 제 맘에 쏙 드는 노래를 만들어서, 싫다는 이를 붙잡고 구경말고 앞으로 저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자 이야기했다. 구경만하기에는 아쉬웠으니까. 

    어쩌면 그게 잘못이었나? 죽은 이는 클로이리샤 님처럼 춤과 노래를 보는 걸 좋아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같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가장 보기 좋은 자리로 데려갔나? 아니면 자기보다 더 멋지게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이라서 클로이리샤 님이 곁으로 데려간걸까? 아니,


    “... ...미안.”


    이건 알량하고 순진한 말로 지워낼 살인이 아니다. 자꾸만 빠져드는 못된 생각은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털어냈다. 그러나 간사하게도 그 생각만으로도 제 슬픔의 무게가 덜어짐을 느꼈다. 그것이 더 싫어서, 미안해서.


    “티르소스, 
    내가 노래해줄게.”


    상념은 지우는게 좋다. 저 멀리 있는 이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작은 속삭임이다. 그렇게 줄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잦아들지 않던 목소리가 도통 커지지를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크기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부족한 숨을 위해 벌렸던 입을 움직였다. 

    서로 엉망으로 지어냈던 노래, 제가 시작했고 그가 마무리를 지었던 동요. 비록 마무리를 지어줄 이가 없으니 제대로 마무리 될 수 없을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시작했고,


    “곰 스무마리... ... 학원에 있어.”


    그리고 노래는 제가 지어낸 곳까지 갈 것도 없이, 첫 노래마디서부터 막혀버린다.
    이는 제가 숫자를 너무 잘 세기 때문일테다.

    결국 무엇하나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웅크린 몸은 제 무릎으로 얼굴을 숨겨버렸다.







    곰 스무마리 학원에 있어!
    티르곰 노엘곰 친구곰~

    티르곰은 심심해
    노엘곰도 심심해
    친구곰은 아무도 안 놀아
    으쓱으쓱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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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른 펜촉
    2022. 4. 14. 14:21

     

    든 깃펜은 양피지 위를 유영하지 못했다. 한결같은 일이다. 몇 번이고 책상에 앉아 깃펜을 들지만 펜촉의 잉크가 마르더라도 이를 써내리진 못했다. 수신인을 적는 순간서부터도 그러했다. 그 이름은 이미 익숙한데도.

     

    To. 벤.

     

    그조차 시작하지 못하니 편지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써내리는 말이 어떤 것이든 결국 본론은 그것이다. 여전히 약속을 지키고 있나요? 설령 그 말을 적지 않는다 해도 상대는 제 편지의 의의를 알아차릴테다. 상냥한 이가 귀찮은 기색없이 써줄 답장을 안다. 그것이 언제, 어느 빈도로 오는 편지라 할지라도.

     

    설령 매 시간마다 부엉이가 날아든다하더라도 그러겠지. 질릴 수야 있겠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기로 한 이는 그이지 않던가. 혹은 그게 질려서 약속을 더는 지키고 싶지 않다 항복하는 편지를 받아내도 좋겠지. 그를 생각하면 터지는 것은 웃음이다. 항복이라니. 저는 호의를 받아냈는데 이 약속은 마치 하나의 승부가 되어버린다.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그를 나누는 기준은 이것이다.

     

    약속을 어기는가, 어기지 않는가.

     

    약속을 지키길 바라면서도 저는 이를 생각한다. 언젠가 어겨질 것이라 당연히 사고해버린다. 남에게 받아 빌려쓸 뿐인 약속에 대해서는 언제 깨지던 크게 개의치않았는데 이 약속은 다르다. 제 것으로 받아냈는데 이를 유지하는 건 타인의 몫이다. 거기서부터 불안이 몰려든다. 타인의 것엔 욕심내지 않는데 제 것이니 불안할 수 밖에. 

     

    이 모든 것이 문득 멍청하다 생각해서, 어느날부턴 마르는 펜촉을 들고 앉는 일도 없어졌다.

     

    차라리 이대로 멀어져도 좋겠다. 하나에 몰입하고, 어차피 저와 다른 길을 갈 이일테니 소소한 기억과 추억으로 잊혀지는 편이 낫다. 저는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었던가 싶어지고, 그를 자각하면 어이없어 코웃음이 터지는데 그럼에도 저는 무섭다.그래,

     

    벤 모렐은 무척이나, 두려운 사람이다. 날선 적의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은 것이 자꾸만 작아진다.

     

    날선 적의와 악의는 쳐내면 그만이고 뼈를 으스러트릴 쇠공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이 두렵다 생각한 적이 없다. 언젠가에 써내던 과제의 제출처럼 보가트로 써냈던 픽시조차도 사실 귀찮았지 두려운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때에도 그를 적어내면서 보가트로 픽시가 나오는 것은 실상 우습다 생각했다. 저는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도 없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제 보가트가 무엇일지 알 것 같다.

     

    그것은 저의 시신도, 미쳐버린 부모의 모습도, 하다못해 그를 닮은 제 모습도 아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두려움이 확연하다. 진정으로, 어느순간부터, 두려워진 것.

     

    다정함이 독이 될 수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질색해 숨이 막히는 기분.

     

    그는 제게 악의를 가질 사람이 아니다. 저에게 적의를 가질 사람도 아니고 공격할 이도 아니다. 오히려 공격이 들어왔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를 반격하는 법이야 알고 있다. 그것이 가지고 오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니 두렵지 않다. 하지만, 

     

    하지만 제 대비와 방벽을 무너트리는 이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 알수가 없다. 그러니 보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을 수 밖에. 사람의 기분을 종일 띄우는 다정함은 그리운 것이나 그것에 흐려지는 제 이성이 무섭다. 그 앞에서 보인 제 추태가 얼마나 되는지 이미 알고 있다. 누구 앞에서 이렇게 무너졌더라면 미친듯이 웃어버렸을텐데. 어떻게 이럴수가. 

     

     믿어보겠다 말한 것과 달리 저는 상대를 믿지 못했고,그러니 어떠한 편지도 보내지 않은 채 약속을 외면했다.

     

     

    ... ...

    저는, 벤.

    당신에게 신뢰를 내어주는 그 순간에도 후회했어요.


    내어주는 순간 차오르는 불안감이,
    자꾸만 당신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라 확신받고 싶어서,
    몇 번이고 매달려서 그를 묻고 확인받고 싶어진다는걸 깨달으니

    내가 너무 추악했답니다.

    맞아요, 당신에게 목도, 숨통도 내어주지 않을거예요.


    신뢰를 주겠다 했으면서도 기대지 않을테죠.
    기대는 순간,
    스스로 걷고 서는 법을 잊을 것 같거든요.


    몇 번이고 들었다 놓은 깃펜은,
    당신에게 하루에도 몇통씩 약속을 지켰냐 묻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고
    이 불안이 진정될 날을 나도 몰라요.

    마법으로만 열 수 있는 방 안에 가둬두고서 당신이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를 확인할거예요

    나온다면 결국, 이라 생각할 것이고
    여전히 자리한다면 아직도? 라고 생각하겠죠.

    진정 당신이 제게 약속을 지켜줄 사람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는 시기가 언제일진 저도 몰라요.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고,
    제게 요구하는 것이 없으니,
    거래조차 이뤄질 수가 없어서
    저는 오로지 당신의 다정함에 기대야 한답니다.

    저는 신뢰를 주는 것보다 받고 부응하는게 더 편해요.
    나에게 내어준 신뢰는 배신하지 않겠지만 내가 내어준 신뢰는 어떻게 어긋날지 모르는 사람이죠.

    만일 당신이 제 목과 숨통을 내어받길 바란다면,
    제가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이 되고자한다면,

    당신도 나를 의지해야해요.
    당신도 그에 상응하는 것을 줘야하고,
    나에게 바라는 것을 말해야해요.

    처음으로 제가 한 말을 어기게 한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도 대단하군요.

    저는 당신에게 온전히 신뢰를 내어준게 아니었어요.

    ........................

    거짓말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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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4. 11. 07:23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처음의 만남이 이다지도 순탄한 것은 아니었음을 상기하게 된다.

     

    흉투성이 얼굴, 경계어린 표정, 날선 욕설들. 그때의 상대는 저에게 있어서 하나의 증명이었다. 머글들은 해악이라는 증거. 실상ㅇ은 억지에 가깝다. 제가 가장 싫은 것은 머글태생이었지 혼혈이 아니었기 때문에, 머글과 결혼한 마법사들을 싫어할지언정 그들의 혈통을 물려받은 자식까지 배척하자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이것은 저를 싫어하는 이에 날선 경멸을 주기 위함에 가까웠다. 제 혈통이 고결하며 그보다 못한 이들은 결국 짐승에 가까워진다는 증명을 보기 위함에 가깝다. 고결한 네 혈통과 달리 자신은 그러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말에, 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관계는 감정의 거래로 이뤄졌다. 서로에게 내어주는 악의를 악의로 갚는 것이 반복되어 이뤄진 것.

     

    흠투성이의 상대가 좋았다. 그는 머글들이란 저열한 짐승들이라 말하는 저의 증명이었으니 그가 가진 고통과 상처는 제게 중요치 않았다. 그는 머글들은 저열하다 외치는 저의 증명인 것과 동시에 그 반은 명백한 마법의 핏줄이라 끝내 제게서 동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자리기도 했다. 동시에 그 동정은 알량하기 그지없어서, 순수한 연민보단 저급한 우월감이 기저에 깔린 채 배풀어졌다. 제게 보이는 날선 악의를, 상처입은 자존심을 더 짓밟고 싶어서. 그와 다른 저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러면서도 가여운 폭력의 희생자에게 향한 연민은 분명한 것이다.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시기임에도 주변이 날선 폭력으로 점칠되었었다는 것 하나는 알아서,

    그리고 그 날들에 폭력에서 벗어난 저임에도 저를 걱정하던 가여운 존재들과,

    그 존재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제 시선은 언제나 저를 보지 않은 부모에게 향했던 이기심을 알아서,

    제 속 한켠에는 그 볼썽사납고 가여운 노예들에게 미안함이 있었고

    짐승이라 폄하되는 이의 위로 그들이 겹쳐지는 것은, 실상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는 아주 복잡한 이름과 형태의 악의를 제게 받아냈다.

    연민으로, 동정으로, 저급한 우월감으로.

     

    그러니 내어준 연고는 어느날의 변덕이자 악의고,

    그것이 오랜시간 반복되게 된 이유는 제 최악의 성격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를 모를 상대는 아니라 생각했다.

    제 동정은 알량했으니까. 저의 만족이었으니까.

     

    "너도 죽여버릴거야. 그러니까 꺼지라고."

     

    그러니 그토록 화를 냈던 거겠지.

     

    그 화도 알량하다. 제 멱살을 잡아채는 이는 저보다 커졌고 힘은 쉬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상대가 제게 가진 것은 악의다. 그러니 거리낌없이 휘둘러질 수 있는 폭력임을 안다. 상대는 제게 분노했고 제가 그의 가장 부끄런 치부를 건들고 있음을 자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게 휘둘러지는 폭력은 순간이고 아프겠지만 제 숨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저는 다시 한 번 섞여든 머글의 핏줄이 저급하다 증명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므로.

     

    "동정받기 싫었나요? 그러면 처신 잘하고 다녔어야죠."

     

    그러니 놀리는 입은 그를 위한 자극이었는데,

     

    "처신? 처신?"

     

    이어 비웃음과 함께 이어지는 것은.

     

    "너도 처신 잘했어야지."

     

    예상했던 것과 같은 통증이며,

    예상치 못한 곳에 휘둘러진 폭력이었다.

     

    물어뜯기는 입술이 아파 이를 입맞춤이라 표현할 수가 없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순간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고, 그러니 제대로 남지 못한 기억 속에 드문드문 떠오르는 편린은 이것이 제게 향해온 완전한 악의였다는 사실 뿐이다. 타인과 좁혀든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저에게 가장 강렬한 불쾌감을 줬고, 물어뜯긴 입술이 아팠으며 저의 악의이자 뮈였으며 그를 위한 수단이던 입은 물어뜯겨 무어라 발설조차 못한다. 끝내 남은 것은 얼얼한 통증과 비릿하게 번지는 피, 그리고 성애의 감정은 없더라도 명백히 저를 깎아내리는 성애의 형태를 띄어서, 강압적으로 퍼부어진 것 끝에 남은 것은 모멸감이었다. 

     

    증명을 바라 건드린 저의 악의는 완벽하게 상대의 조롱으로 되갚아져 남은 게 무엇 하나 없다.

     

    폭력적이고 저열한데 동시에 제 악의에 대응한 완벽한 수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제가 입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미쳤냐는 것이 전부였으므로. 제 악의에 대응하는 법을 안 이는 이후로도 그를 자주 사용했으니 그 와중에 미치던 것은 저였다. 모멸감은 어느 순간 상대의 강압에 속절없이 당한다는 것에서, 그에게 꼼짜없이 꼬리말고 진 개 신세가 되었다는 패배감에서 기인하게 됐다.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더라. 모멸감의 이유를 깨닫고 나면, 그에게 당하는 입맞춤의 형태의 폭력은 다른 것에 의해 덮어질 수 있음을 알았고 저는 그에게 짓눌리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 더 크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나면, 입맞춤이라는 것은 실상 제게 감안할 수 있는 것이 되어서.

     

    "받아요."

     

    저는 제 악의를 받기 싫어하는 이에게 재차 악의를 던져주고,

    무어라 제게 말해오기도 전에 다가서 상대의 멱살을 잡아챘으며,

    제가 먼저 거리를 좁혀와 물어뜯기만 한 입술에 제 숨을 부볐다.   

     

    이것은 그가 제게 행해온 폭력과는 다른 형태로 시작된다.

     

    입술을 맞부비고 혀를 얽는다. 도망치려는 양 저를 밀어내려한다면 더 단단히 잡아챈 채로 고개를 틀어가며 숨을 뺏는다. 이 과정 중에는 세우는 이도 없고 비릿하게 번지는 피도 없다. 

     

    오로지 악의와, 저에게 주는 모멸감을 위해 취한 것이 성애적 형태라면

    저는 이 형태에 그 의미과 감각까지 넣어 상대에게 되돌렸다.

     

    "당신이 너무 못해서."

     

    모멸감은 당신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도취되는 승리감 아래 피가 아닌 타액으로 점칠된 입술에 짧게 입술을 내리 누르고,

     

    "키스란, 이렇게 하는 거랍니다."

     

    쪽, 부러 더 달짝한 소리를 내며 그에게 받은 모멸감을 되돌렸다.

     

    네가 주려는 모멸감은 제게 효과적이지 않고,

    오히려 네가 나에게 준 폭력은 성애적 형태를 취한 것이 우스운 것이라고.

    서로에게 내어주는 악의 속에 상대가 제게 가진 혐오의 감정을 아니 이는 가장 효과적인 앙갚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저와 그의 관계는 서로에게 악의와 악의를 되갚아지는 사이였으며 그도 저에게 지고 싶어하지 않는 이였음을 생각해보면 이후의 일은 당연한 일인데도, 그리 알량한 사고로 승리를 예상했다.

     

     

     

     

     

     

     

     

    "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설령 이것이 착각이라면,

     

    당신은 사랑하는 내가 영원토록 착각에 빠지게 만들어야함이 옳지 않나요?

     

    멍청하게 착각해서, 당신을 사랑한다 여기는 이를

    영원히 그와 같은 착각 속에 빠지도록,

    당신과 있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행복인 것마냥 달게 굴면서.

     

    혹시라도 아모텐시아에서 깨어나듯 한순간 당신에 대한 사랑이 덧없어진다해도

    결코 그 곁을 떠날 수 없게 당신만이 가질 수 있는 흠집을 만들어도 나쁘진 않을거예요.

     

    당신이 자주 범하고 자리하는 곳이 분명 있는데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 아주 오래 기다려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불안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면,

    당신의 불안을 자극해서 나를 더 잡도록 만들거예요.

     

    말했죠? 나는 당신이 저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사랑해버린 당신을 아니까,

    싫은 모습을 보여서라도 당신을 잡아채는 수 밖에.

     

    당신 혼자 만든 게 아니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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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린 아직,
    2022. 3. 29. 15:41





    이 모든 것은,


    죽지 않기 위한 발버둥,
    단말마가 되지 않기 위한 비명.

     

     

     

     

     




    침잠해온 고요는 때론 아주 역겨운 것들을 부르곤 한다.

    웅크린 몸은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하기 급급한데 주변에는 들릴 수 없는 소음들이 울렸다. 그것은 때론 부숴지는 소리를 냈고, 혹은 깨지는 소리, 또는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서 찢기는 소리를 선명히 강조하기도 했다. 살갗이 짖겨지고 비명은 저택을 시끄럽게 울려든다. 죄없는 자들이 용서를 구하는 소리가 거북하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역겨운 건 고통을 선사하는 주체이면서도 가장 비탄에 빠져 스스로를 연민하는 울부짖음이다. 날카롭게 깨져드는 예리한 비명은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모든 게 그릇되었어.
    마법을 가지지 못할 자들이 마법을 가지고
    이 더러운 세상 속에 살아갈 네가 너무 가엾다.

    이 세계를 돌리기 위해 노력했어.
    우리는 그분이 아니라 이 세계를 되돌릴 수가 없어.
    남은 건.... ....

     


    듬성듬성 남은 기억의 편린에 불과한데도, 오랜 시간동안 들어온 탓인지 이다지도 뇌리에 생생하다. 언더힐 저택의 적막을 상기할 때마다 이는 종종 울려들곤 했다. 저는 저의 부모가 미쳤음을 알고 그들의 광증이 제게 또아리를 틀었음을 알아서, 언제나 이것을 경계했다. 아무리 분풀이를 한다고 한들 삭혀들 화가 아님을 알았고, 시간이 이를 덜어낸다 한들 화가 자리했던 빈 자리엔 공허만이 남아 스스로를 자멸의 길로 내몰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올곧게 빛나던 신념은 타인에 의해 허물어지고 무너져 갈피를 잃고, 흔들린 신념은 복수를 향하지만 이는 정당할지언정 이미 흔들려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는 어설픔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멜리사 언더힐은 이를 경계했다. 제 부모와 같은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랜 시간 괴로워하고 울부짖었지만 울분은 덜어지지 못했고 배신자들보다 더 추하게 바닥에 추락한 신념은 볼썽사나웠다. 어린 딸이 오랜 시간 지켜온 그들은 한낱 짐승에 불과해서, 저의 보호자가 어째서 그들이 짐승이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한 때 가지고 있었던 신념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는 언제나 이를 경계했고, 그들의 수순을 밟고 싶어하지 않았다. 살아 숨쉬는 시간동안 감정에 휩쓸려 보내는 허송한 세월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그저 기회를 박탈시킬 뿐이니 저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가장 경계했던 것이, 환청이, 울분이, 한평생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고통이, 지금 제게 도래했다. 허송하다 비웃고 저급하게 내려본 짐승의 울분을 저는 이해했다. 무엇도 할 수가 없어 울부짖고 시간을 축이는 것만이 전부인 삶이 다시금 언더힐 저택에 도래해, 이번엔 제가 그 주인이라 말한다.

     

    고여선 안되니 나아가야하는데 걸음을 내딛어야할 방향을 몰라 멈춰있는 것이 전부다. 속에서부터는 울분이 차오르고, 저의 모든 것을 내걸었으나 끝내 도달하지 못한 목표에 차오르는 무기력함이 목을 졸랐다.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잃은 이는 무력함에 목이 졸려듬에도 버둥거리지조차 못했다. 아니, 실은 남아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차오르는 울분이다.

     

     

    제 숨이 끊어지도록 모두 걸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이룬 것 하나없이 목숨 하나만 알량하게 부지하여

    제 숨의 용도를 다 해내지도 못한 채 생을 연명하고 있다.

     

    그것이 저를 가장 미치게 만들었다.  

     

    죽음보다 더한 공허가 저를 찾아온다. 스스로를 보호하고, 웅크려 묶어놓아도 오랜시간 이곳에 고이면 제 끝이 어떻게 될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귀에 들리는 환청이 환청으로 끝나게 되지 않으리란 것을 직감했다.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에 침몰해 결국 무엇도 해내지 못한 채 미쳐 스러지는 것이 제 목숨의 마지막일테다.

    이 저택은 저의 요람이었으나 동시에 제 부모의 무덤이었고, 이제는 저의 무덤이 되고자했다. 돌아온 저택은 의미를 새로 써내려가고자한 저의 각오와 달리 거대한 관이 되어 저를 옥죄었다. 이 길의 끝에 선 저는 무엇일까. 결과를 승복하지 못해 템페스트들을 죽이겠다며 지팡이를 들고 나선 미쳐버린 패잔병? 생각하니 터지는 것은 그저 날선 웃음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전쟁의 승패를 깨닫는 순간 미쳐 날뛰어보기라도 할 것을. 그 자리에서 저열하게 지팡이를 휘두르고 죽었더라면 차라리 더 나았을테다. 뒤늦은 발악의 꼴은 제 부모와 다를 게 없었다.

    웅크렸던 몸은 한껏 더 움츠러들고 제 손은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거침없이 헤짐어 그를 움켜쥐었다. 


    "아.... .... "


    그런 꼴을 위해 나아간 앞으로가 아니다. 


    "아아.... ..."


    저는 목소리를 낸다. 이대로 죽지 않기 위해서, 


    "아아아... ....!"


    귀에 시끄럽게 드는 죽음에 먹히지 않기 위해.


    "아아아아아악!"


    이대로 미칠까보냐.

    무기력하게 웅크렸던 몸은 튕기듯 일어나 제 주변의 망토를 챙겨들었다. 지팡이를 움켜쥐고 저는 무작정 저택을 나섰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목숨 하나만은 남아서 저는 무엇이라도 해야했다. 숨을 쉬는 그 모든 순간은 저에게 앞으로 나아가라 말했다. 바라는 바를 쟁취하라고, 멈추지말라고, 죽지 말라고, 미치지말라고, 살아가는 발자취가 타인의 눈에 짐승으로 남지 말라고.

    나아가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으나 방향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방향을 잃은 걸음은 흔들리는 지팡이 끝과 다를 바가 없다. 그를 생각하면 방향을 잡아야한다 생각했다. 그 방향을 저는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 구하는 답으로 살아가는게 아닌 법이다.


    세상엔 현명한 자들이 있고,
    현명한 자들의 지혜를 활용해 군림하는 자들도 있는 법이다.
    지혜가 오롯한 가치가 아니니 호그와트에는 네 개의 기숙사가 있었고
    야망을 삼킨 뱀은 이 중 찾아가야할 이가 누군지 알았다.

    저에게는 독수리가 필요했다.



    에일라 캐번디시.

    그 생각 하나로, 저는 무작정 저의 벗보다 저 진득한 이름을 가진 이를 찾았다.



     


    그리고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저의 저택과 다르지 않았다.


    "있잖아, 언더힐. 잊은건 아니지?"


    잡아챈 멱살, 저는 침잠하는 이를 끌어올려 그 낯과 얼굴을 마주했다. 불쾌하게 엉켜드는 알코올 향, 상대를 끌어올리면 그는 더 짙어져 그의 모든 말 하나하나에 술 기운이 훅 끼쳐들었다.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는 몸은 늘어지고 그 와중에도 저와 지독하리만치 닮은 이는 입만 살아 저에게 묻는다.

    그는 저와 닮았지만 동시에 가장 다른 사람이라고. 함께 지팡이를 들었을지언정 머글태생들이 마법 세계에 어울리길 바라는 별종이고 저는 그들을 온전히 내쫓길 바라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결국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님을 말했고,


    "너와 내가 꿈꾸는 세상은 달라.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기에 날 찾아왔어?"


    그렇기에 찾아와 그에게서 답을 구하는 저의 우둔함을 꼬집었다.


    "정말 변화를 추구하는게 맞아? 

    순혈끼리 잘 먹고 잘 사던 

    과거의 영광을 찾아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고?"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이 방을 매우는 술기운만은 아닐테다. 언더힐 저택을 닮아 죽어드는 자를 위한 공간엔 공허가 물씬 베여 도망쳐 나온 걸음에도 발목을 재차 붙잡는다. 답을 찾기 위해 온 독수리는 벗보다 더 진득한 이름을 하여 뱀과 얽혔고, 그 이름답게 뱀과 터무니없을만치 닮은 꼴을 보이기도 했다. 결코 마주할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는데 종종 그를 볼 때면 거울 앞에 선 기분이었다.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닮았고, 같으나, 그럼에도 결코 닿지 못하는 경계가 자리해있으니 거울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테지.

     

    독수리는 지혜롭고 그러니 무작정 그를 찾아온 뱀의 우둔함을 쉬이 꼬집는다. 뱀은 무어라 말을 할 수 없다. 왜냐면, 독수리는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던진 것이므로. 뱀이 할 수 있는 말도 그가 한 말과 다를 것이 없다.

     

    순수의 이념이 높아지길 바란다. 순수의 가치가 인정 받길 바란다. 마법사답게 원하는 바를 향해 나아가는 확고한 신념을 갖추는 이들을 보길 바란다. 순수는 오랜시간 지켜져왔고 그 가치를 가진 이들이 그 가치를 알았으면 했다. 순수가 마법을 부리를 수 있는 모든 재능의 잣대는 아니나 그저 마법을 잘 쓰는 것을 바란다면 마법사보다 마법을 뛰어나게 활용하는 생물들은 많다. 당장 집요정만 해도 그러한걸. 그러니 마법사는 마법 뿐 아니라 다른 가치로써 자신을 입증해야만 하고, 그 중 순혈은 모범이 되어야만 했다. 순수의 가치는 인정 받아야하고 순혈들도 스스로 그걸 알아야 하며 긍지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갈고 닦아야함이 옳았다. 순수의 가치는 잊혀지고 순혈들은 긍지가 없으며 의무는 흐려져 누구도 그를 지지 않는다. 가장 마법사에 적합한 것이 순혈이어야하는데 저는 그에 부합하는 자들을 본 적이 없다. 배신의 죗값은 사라졌고 신뢰와 신념은 순수와 같이 가치를 잃으니, 진정 올바른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선 순수가 잡혀야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니 순수의 이념이 사회의 가장 큰 가치이자 통념이 되어야 했다.

    그 속에서 마법을 갖춰선 안될 자들이 훔쳐낸 마법도 뺏고 꺾어야함은 당연한 수순이다. 저와 눈앞의 이는 늘 이것으로 서로를 마주볼 수 밖에 없었다. 제 이상을 말한다한들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았으니 결국 입 밖에 내봤자, 그에게 있어선 순혈들끼리 잘 먹고 잘 산 과거의 영광을 되돌리는 것에 불과할테지. 저는 입이 있음에도 말을 꺼내들 수가 없었고,


    "대답해봐, 언더힐... ...

    이것만 확실히 하면 방법인지 뭔지 생각해볼테니까."


    이 속에서, 상대는 재촉한다. 저는 무엇을 바라 왔냐고. 무슨 생각으로 왔냐고. 그러면 할 수 있는 대답은 무엇이던가. 멱을 잡아챈 손아귀에 힘은 풀어지지를 못하는데 제 입은 열리질 않는다. 입을 연 그 모든 순간부터 저는 그에게 예정된 말을 할 수 밖에 없으므로.

     

    "그러는 당신은."

     

    아니,


    "당신은 왜 이러고 있나요, 캐번디시?"


    질문에 답을 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간악한 뱀은 제가 바라는 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러므로 결론을 위해 나아가는 길은 비단 정면만이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뱀은 올곧게 나아가지 않고 휘어 독수리의 눈을 흐렸다.

     

    "비록 이노센트가 패배했을지언정 템페스트의 이념은 머글태생들의 평등이었으니 

    당신이 바란 바는 절반 이뤄진 것이나 다름 없잖아요."


    나긋하게 속살거리는 제 목소리엔 일말의 분노도 얽히지 않아 스스로도 웃음이 났다.


    "이노센트의 승리 이후 머글태생들의 인권을 부르짖는 것이 더  힘들었을테니 

    어쩌면 이것이 당신의 이상을 위한 가장 쉽고 빠른 길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어째서 당신은 죽은 자처럼 고여있나요?

    아, 복수를 위해 템페스트를 죽여버렸어야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당신의 이념보다 복수가 더 중요했던가요?"


    저는 눈을 가리기 위해 독수리의 가장 큰 치부를 건드린다. 

     

    "저는 죽지 않기 위해 왔어요, 캐번디시."


    그럼에도 분노에만 잠식되는 상대는 곤란하다. 멱살을 잡아챈 손에 더 힘을 줘, 상대를 바짝 끌어당겼다. 오로지 상대의 술기운만이 번져들던 거리에서 제 숨도 섞여들 거리까지 좁히고 나면, 상대와 녹빛을 온전히 마주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건 저열한 짓인데

    승복해 고여있으면 미쳐 제 부모꼴 날 것이 분명했거든요."

     

    언더힐 저택에서 그렇게 미쳐버리건, 혹은 아즈카반에서 미쳐버리건.


    "어느 쪽으로든 저의 죽음은 확실해보이니 이대로 죽지 않기 위해 나설 수 밖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멍청한 짓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전 살아있고 기회를 쟁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기회를 알아야해서 왔어요. 방향을 잡고 어떤 기회를 노려야하는지 알아야해서."

     

    제가 도망쳐 나온 언더힐 저택은 저의 관이자 거대한 무덤, 제가 바꿔내고자 했으나 결국 바꾸지 못한 세상의 축소판. 도둑들에게 함락된 성. 태어난 순간부터 얽혀 살았는데 죽는 마지막까지 그곳에서 예정된 말로를 겪고 싶지 않다.

     

    "저는 여전히 머글태생들을 죽여버리고 싶어요.

    이 사회를 진정 올바른 가치로 되돌리고 싶다구요.

    오랜 역사로 이뤄낸 사회는 템페스트란 폭도들에게 함부로 빼앗겨선 안될 가치니까."

     

    여전히 상대와 저는 마주보는 거울이고 결코 닿을 수 없는 경계선 너머의 사람이며, 끝내 서로에게 겨누는 지팡이조차도 같겠지만, 

     

    "그 방법을 찾고 있는데, 뱀은 야망을 품을 수 있을지언정 독수리에 비할 지혜는 아니니 그를 빌리고자 왔답니다."

     

    등을 맞댔을 때에는 제 적에게 지팡이를 겨누는 든든한 편이 될 수가 있다.

     

    "당신도 이 상황이 돌아가는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생각하세요. 

    일어나요. 그리고 나를 도와요. 

    이대로 고여봤자 남는 것은 미쳐 날뛰는 짐승꼴 밖에 되지 않아요.

     

    그게 당신이 되었건,

    혹은 저 밖의 템페스트가 되었건."

     


    뱀은 마지막까지 속살거렸다.

    가장 저의 본질을 닮은 색상을 마주하면서.

    저의 색을 가진 자에게 야망을 얽어.

     

     

    "캐번디시,
    우린 아직 서로에게 등을 맡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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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몰이해
    2022. 3. 11. 15:40

     

     

     

     

     

     

    들려오는 말은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내가 슬리데린에 갔다면,
    너의 생각을 이해가 아니라 공감할 수 있었을까?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눈앞의 이는 즐거운 주제를 던지는 이다. 대화가 서로를 향한 이해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누던 의견이 싫었던 적은 없다. 스스로가 옳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럼에도 혼자 외치기만 하는 것은 때론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장소에서 의미없는 발악처럼 느끼기도 해서, 저는 제 사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꽤 즐거워졌다. 그리고 눈앞의 이는 그런 저를 자주 즐겁게 한 이였다.

     

    그리고 말했듯,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기도 했다.

     

     

    "머글태생을 옹호하면서 템페스트와 싸우는 모순은 나만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가 다수파?"

     

     

    들렸던 말은 우습고도 실망스러울 수 밖에. 순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이 숭고한 이념을 템페스트의 척결의 수단으로 쓰는 이들이야 자주 보았지만 이처럼 모순적인 사상으로 이노센트의 자리에 선 이는 처음이다. 그리고 그를 깨닫고 나면 지난 날과 상대는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와 저는 나란한 평행선에 불과하다고.

     

    복수를 위해 지팡이를 들고 그들을 겨누게 된 순간에도 그는 폭도들과 폭도가 아닌 머글태생들을 구분해낸다. 제 시선에는 똑같이, 자리를 탐내는 위선적인 짐승들에 불과한데. 그 차이를 구분해내어 정확하게 겨눠진 복수를 담아낸 지팡이가 한없이 우아해보이다가도 불필요한 구분을 해내는 그의 성정이 못마땅해 혀차는 소리가 무례하게도 튀어나왔다.

     

    "제가 본 이들 중에서 당신이 가장 이노센트를 우습게 활용하네요. 순수의 이념을 부르짖지도 않으면서 템페스트에 대한 복수로써, 제거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뜻을 함께한 이들은 봐왔지만 머글태생을 옹호하기 위해 이곳에 선 당신이 가장 이질적이예요. 그러니 저에게 템페스트와 머글태생이 다르지 않냐 말했던 거군요."

    그를 생각하면 눈앞의 이는 여전히 변하지 못한 사람이다. 한결같은 사람이며, 한결같아 오히려 실망스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변하지 못하는 이를 처음 만났을 때에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호기심 많은 독수리답게 많은 것을 궁금해하는 모습이 저와는 달랐고 하나하나 물어오는 질문은 불쾌한듯 하면서도 저를 즐겁게 했으니 성실히 답했다. 이러한 존중과 호의는 그가 가진 캐번디시의 이름으로 이뤄졌으나, 정작 그 스스로는 캐번디시에 걸맞는 이는 아니었다. 툭, 튀어나온 것만 같은 돌. 계곡을 이루는 거대한 압벽 사이에서 툭 튀어나온 흙덩이. 휩쓸려야 가야함이 마땅한 자리에서 그 존재를 이질적이게 드러내는 기묘한 존재.

     

    순혈이면서도 긍지가 없는 사람.

     

    그러하니 당연히 템페스트의 측에서 볼 거라 생각했던 이였고, 그리하여 이노센트와 뜻을 함께하는 것을 알았을 땐 놀라 기뻐했다. 그리고 기쁨은 실망이 되어 제게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이를 오랜시간 티를 낼 생각은 없어서, 짧게 들이키는 숨과 함께 화제를 돌려버린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그는 확고한 신념으로 지팡이를 들었고, 그릇되었다한들 지팡이를 든 모습까지 폄하할 생각이 없으며, 나아가 확고하게 겨눠져 휘둘러지는 지팡이는 우아하므로. 그리고 저는 언제나 상대를 존중했다. 그 피의 가치대로. 그러니 돌린 화제는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에 대한 것이다.

     

    "기숙사의 차이가 우리의 사상을 나눴다 생각하나요? 하지만 캐번디시. 당신은 그 순혈 가문의 사람이면서도 그들과 사상과 다른 사람이었어요."

     

    질문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었으나 답은 확고하다.

     

    "이것은 기숙사의 차이가 아니예요.

    세상이 그릇됨에 따라 거기에 물든 사람이냐 아니냐의 차이랍니다.

     

    당신이 저를 이해치 못하는 것은 이 모든 사회가, 세상이 그릇되었기 때문이에요.

     

    모두가 순수에 담긴 의미를 외면하고

    머글태생이란 저열한 종자들을 기꺼이 감내하고 받아들이는 위선에 눈이 가려졌으니까요."

     

    머글태생도 마법을 부리니 마법사다, 받아들여야한다, 그렇게 위선을 떠는 세상에서 살아간 호기심많은 독수리인데 자주 보고 들여다본 세상에 익숙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왜냐면 사람은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거짓 또한 오랜 시간 속이면 진실이 되어버리는 법이므로.

      

    "그러니 저는 이 그릇된 것을 바꾸고자 이 자리에 섰어요.

    진정 올바른 가치와 사상을 갖춘 사회로 되돌리기 위해서."

     


    저의 부모가 던진 1984년의 돌멩이, 번지지 못했던 파문, 어둠의 마왕에게 목을 매고 모든 걸 걸었던 신념이자 패배로 끝난 지난의 전쟁. 그를 발판 삼아 그와 달리 실패하지 않겠단 각오와 다짐으로.

     

     

    "그러니 답은, 기숙사가 아니라 이런 세상이 아니었어야한다고 답할게요.

    호기심 많은 독수리의 눈을 가린 건 야망보다 큰 호기심이 아니라 그가 봐야했던 세상이니까."

     

     

    그 때엔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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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념
    2022. 3. 10. 01:50

     

     

     

     

     

       "제가 할 말을 언제나 당신이 하는군요."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들리는 말은 제가 상대에게 가진 생각이다.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상대를 실망시키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다르기도 해.


       "그리고 저의 아주 부끄러운 치부도 건드리고 말이죠. 맞아요, 당신은 제게 약속을 내어줬답니다. 당신이 허투루 이야기 한 것이 아니며, 제게 내어준 명백한 호의였음에도 그에 불안해한 것은 저죠."

     

    나는 비록 목은 아닐지라도 이미 약속이란 이름으로 무언가를 내어줬어. 그건 지금의 솔직함도 포함되는 거고. 그 말에 올라오는 것은 흐릿한 자조다. 상대는 제게 이미 충분한 것을 내어줬는데 거기서 만족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저다. 문득 그 꼴이 제가 말하는 짐승들과도 같은 것 같아 불쾌감이 울컥, 차오르는데 그럼에도 이를 온전히 부정할 수가 없다.

     

    저는 귀한 것을 받아놓고서도 그에 만족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안해했으며,

    제가 내어줘버릴지도 모를 것과 상대의 것이 가치가 동등하다 여기지 않았으므로.


       "제가 당신의 약속이 불안했던 건 그에 기대고 안주하는 제 자신이 무서웠기 때문이랍니다. 말했듯이 그는 목과 숨통을 내어주는 일이니까요."  

    상대가 내어준 약속은 분명 저를 기쁘게 했고, 그로 인해 오랜 시간동안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던 것은 그 약속에 묻혀 흐릿해진다. 언젠가의 상실과 이별이 상냥한 호의로 덮여진다. 무엇 하나 잃게 해주지 않겠다는 말은 가장 최초의 마법부터 상실을 겪게 한 이에게 기쁜 말이다. 나아가 그를 알고 있는 이가 해주는 말이니, 그 다정함이 숨통을 조이도록 좋았다. 그래,

     

      "그런 일은 오지 않을거라고 했나요? 벤, 당신은 어느 정도는 성공했답니다. "

     

    목과 숨이 조이도록.

    내어줘선 안될 것이 상대의 손에 들렸다.


    "왜냐면 나로 하여금 타인을, 당신을 믿어보고 싶게 만들었고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가장 추악한 일면을 드러내게 했잖아요. 당신의 약속에 기뻐 얼토당토 않는 말까지 했었죠."  

    몇 마디에 울어버리던 낯, 훗날엔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엉망된 얼굴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상대의 팔을 움켜잡는데 급급했다. 무를 수 없는 약속이라 강요하기 급급했던, 조금도 포장되지 못한 날 것의 속은 추악하기까지 해 오히려 회상 속의 제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말했듯이 그를 받는 것은 나나 당신에게 가장 최악이 될거라 말할거예요. 당신에 대한 실망으로 관계가 쉬이 끊어진다 했나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생각은 제가 했던 거랍니다. 왜냐면 나는 그럼에도 가장 너절한 속을 숨기고 있으니까요."

    서로 기대어 지탱하면 되지 않냐, 나도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그 말에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다. 틀릴 것 없는 말이나 동시에 가장 틀린 말이기도 했다. 사람에게 기대어, 목과 숨통을 모두 내어준 자신은 볼썽사납다는 말로 끝날 것이 아니므로.

     

    "벤, 숨통을 내어준 이는 언제나 불안해서 상대를 더 옥죌수 있다고, 그리 생각해보진 않았나요? 당신의 속을 언제나 파헤쳐보고 싶고 궁금하지만, 그 전에 제 민낯까지 모두 말해줄게요."

    몇 번이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다가 삼켜냈던 것들이 토해내진다. 언제나 말해왔듯, 상대는 제 부끄러운 속을 드러내는데 재능이 있다. 그럼에도 그 꼴이 얼마나 최악일지 알아 삼키기 급급했는데, 결국 끝까지 내몰리고 내몰려 저는 이를 스스로 드러내기로 했다. 우발적이었으나 늘 생각했던 최악이, 드디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기어올라왔다.

     

     "제가 당신이 무섭다 했었죠. 당신은 저의 올곧지도 품위를 갖추지도 못한 모습을 보이게 하기 때문이에요. 자신을 중심 삼아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나로써 존재하고 싶은데, 당신은 사람을 믿어보고 싶어지게 만들었고, 기대하게 만들었답니다. 그에 내어준 신뢰는 저의 가장 큰 후회가 됐어요.

    당신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의심스러워진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당신인데 부정적으로만 사고하게 되는거예요. 그 약속을 지키고 있을까, 그저 단순한 흥미로 내어준 건 아니었을까, 지금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의심은 이렇게 끝난답니다. 언젠가... ... 내가 믿고 있는 이로 인해 내 부모꼴이 나버리는 건 아닐까."  

    태어난 순간부터 보아왔던 것은 미쳐 울부짖던 부모의 모습이다. 그들이 어떠한 신념과 사상으로 저를 등졌는지 알게 된 것은 먼 친인척의 손에 거둬진 이후였으니, 제가 본 부모는 언제나 미치광이였다. 그들의 광증에 불안해하면서도 떠나보내기는 싫어 잡았던 이는, 마침내 부모가 완전히 제 곁에서 떨어진 이후에야 그들이 미쳐간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마왕에게 충성했고,

    마왕은 배신당했다.

     

    신뢰라는 것은 가장 날카로운 비도로 위대한 마법사도 죽여버렸고,

    제 부모는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어 비참하게 살다 미쳤으니,

    신뢰라는 이름은 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부모가 얼마나 뛰어난 마법사였는지, 신념과 순혈의 긍지를 알던 이였다는 것을 들으면 그들에 대한 존경과 함께 자라는 것은 두려움이다. 신뢰는 쉬이 내어줘선 안되고, 사람이란느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언제나 그를 경계해야하는 것이 됐다. 그리하여 저는 결코 내어주지 말고 어둠의 마왕과 부모의 꼴이 나지 말자 다짐했다. 

     

    그러했었다.

     

        "이렇게 끔찍할 정도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신뢰인 줄 알았다면 내어주지 말걸. 저는 그렇게 후회했어요. 당신이라는 사람을 그대로 가둬 언제 마법으로 문을 열고 나올까 그를 지켜보면 맘이 편해질 것 같았답니다. 당신이 약속을 어기는 그 순간을 봐야만 할 것 같았죠. 당신이 이를 어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야하는데 자꾸 어길 것 같단 불안이 스물스물 올라오니까요. 우습게도, 당신은 무엇 하나 잘못한 것 없이 호의를 내줬을 뿐인데 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의심하게 되었다는거예요. 하! 미쳐버려도 어떻게 이렇게 미칠 수가 있을까!"

    이러하니 터지는 것은 웃음일 수 밖에. 스스로의 모습이 미친 꼴과 다름이 없음을 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약속을 지키고 있냐 확인하고 싶고, 분명 쌓였던 관계는 약속만이 있는 것이 아닌데 제 사고는 편협하게 하나의 불안만 잡고 그에 목을 맸다. 스스로 해결해낼 수 없는 불안이 잠식하고,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열쇠는 타인의 손에 들렸음을 확인할 때마다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다. 이 불안엔 이성도 논리도 없다. 그러니 불안을 제거할 수 없고 남은 것은 그저 외면일 수 밖에. 눈을 감고 애써 무시하고 다른 것으로 모든 관심을 돌려, 

     

       "그래서 당신이 보고 싶고도 보고 싶지 않았답니다. 차라리 아주 먼 이후에 만나 그 약속도 당신에게 모두 빛바래졌을 때 만났으면 했어요. 그렇게 모든 것이 퇴색되고 의미없어졌을 때 만나게 되면 저의 모든 불안이 끝날테니까. 그리고 외면하고 눈돌리고 있으면 당신의 약속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고,"

    말했듯이 전혀 멋지지 않은 이유다. 즐거웠던 편지는 끊기고 연락은커녕 소식에서부터도 최대한 눈을 감은 건,

     

    "기대를,
    제 목과 숨통을,
    내어줄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취한 양 이성과 논리가 어그러져 모든게 제멋대로다.

     

       "내어주지 않을거라 했나요? 맞는 말이에요. 내어줘선 안되는거니까요. 그런데 자꾸 당신은 내어주고 싶게끔 만들어요."

     

    내어준 신뢰만으로도 저는 이렇게 미치는데 이 얼마나 우스운 소리인지. 스스로도 꺼내 놓은 말이 우스워 소리내 웃어버렸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할 수 밖에요. 당신이 호의를 내어준 이는 사람을 불신하고, 신뢰에 보답할 수 있을지언정 스스로는 신뢰를 걸 수 없는 이랍니다. 차라리 당신이 먼저 그 약속들을 무른다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 옛날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즐거운 대화, 즐거운 관계.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 네, 그렇게요. 혹은, 당신이 먼저 실망해서 떠나는 것도 좋겠죠."

     

    언젠가엔 이러한 속에 실망할까봐, 이대로 관계를 뒤트는 것은 저일까봐 두려워 삼켰던 것인데 오랜 시간 잠식했던 불안은 그러한 두려움도 삼켜냈다. 부모의 광증을 닮고 싶지 않아 끊어낸 것들이 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 어느 순간 저는 그를 닮아,

     

       "당신이 내어준 약속과 솔직함에도 저는 이렇게 밖에 답을 할 수가 없으니, 그 체념과 두려움은 당신의 몫이 아니랍니다. "

     

    제게 오랜 기쁨을 내어준 관계마저도 스스로 놓게 했다. 상대에게 놓으라 등떠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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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어이.
    2022. 2. 28. 03:55

     

     

     

    단 맛이 혀끝을 아리게 하고

    목을 메이게 해,

    그에 숨통이 조이는

     

     

     

     

    눈앞의 이를 무어라 정의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처음 마주했던 시선보다 높아진 이가 있다. 높아졌음에도 동등하게 맞춰주는 시선은 내려보는 것이 아니고, 한결같은 호의와 배려가 담긴 채 진솔히 속을 드러내주니 마주하는 것이 즐겁다. 어린 날 언제까지고 어울릴거라 말한 흑빛은 길게 자리했고, 그 날의 말과 다를 것없이 근사하게 어울린다. 직설적인 표현은 우아해졌음에도 여전히 솔직해서, 그 옛날과 아주 많이 달라졌으나 동시에 여전한 사람이다. 한결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갈수록 저는 이를 정의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눈앞의 이는 웃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 제 입가의 호선은 조금씩 줄어든다. 분명 상냥한 말과 음성인데, 저에게 내어주는 호의가 명백한 웃음인데 그를 확인하니 제 가슴 한켠에 무언가 자리한듯 무거워졌다. 지긋하게 내리누르는 것은 아픈 통증은 아니나 버겁다. 저로써는 오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데 내리누르는 무게만큼 쉬이 사라져버릴 것도 아니라서, 결국 감당하지 못한 채 고개가 떨어졌다. 무거워지는 것은 심장이니 그를 감싸듯 어깨는 둥글게 말리고, 제 손은 얼굴을 감쌌다. 

     

    무엇도 말을 할 수가 없다.

    당혹과, 수치가 아니더라도 입을 다물 수 있음을 상대가 다시 알려준다.

     

    “계속해 증명할 수 있는 약속을 다시 할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떤 이유에서든.

    설령 네가 곁에 없는 순간이라도 문열기 주문은 쓰지 않을 거야.”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는데 익숙한 사람이 아닌데, 아이러니하게 저는 상대에게는 자주 억지를 부렸다. 무턱대고 약속을 지켜달라했고, 의미도 모른 채 정말 지킬 생각이 있냐 물었고, 의미를 알려주고서도 지킬 수 있냐 재차 물었다. 그 때마다 들려오던 상냥한 대답들은, 어쩌면 그것을 알아 억지를 부렸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와 같은 대답이다. 저에겐 중요한 의미라고, 그러니 진정 약속할 수 있겠냐고, 내어준 것들이 모두 기뻐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다 했는데 상대는 되려 그를 더해준다.


      “가장 싫은 게 생겨나지 않도록, 네가 내게서 잃는 것이 없도록 노력할게.”


    내어주는 상냥함이 달다. 그에게서 풍기는 향은 분명 달짝한 것들이 아닌데 하는 말들 중 달지 않은 것들이 없다. 그 말들이 하나의 형태가 되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단 디저트가 되었겠지. 베어무는 것만으로도 혀가 아리고, 텁텁해 목이 메이며, 그러다 못해 숨통까지 조여드는 그런 것. 


     “그래서 언젠가는 네가 문열기 주문을 떠올렸을 때 

    상실이나, 이별이 아니라 

    기쁨이나 지금의 약속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면 좋겠어.”


    그 주문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도 말을 했는데 들리는 말이란. 제 부모가 등돌려 떠난 주문이고, 저의 첫 마법의 실패를 증명하는 주문을 기쁨으로 바꿔주겠다는 말은,

    이 얼마나 오만하고,
    끔찍하며,
    다정한지.

    숨이 막혀 말을 할 수가 없다.

    당혹과, 수치가 아니더라도 입을 다물 수 있음을 상대가 다시 알려준다.

     

    다정함에 기댄 욕심투성이의 질문을 던지면서도 저는 생각했다. 그에 대한 답이 거절이어도 괜찮겠다고. 아니, 어쩌면 가장 바란 것은 거절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없이 했던 약속은 얼굴이 엉망이 된 이를 달래기 위한 말에 불과했을 것이고, 그보다 더 큰 의미이니 겁을 먹고 뒷걸음질칠지도 모른다고. 그리된다면 웃으면서 그동안 지켜준 것으로 충분하니 고맙다해야지. 그런 생각도 있었다. 재차 약속해주길 바라는 욕심과 더불어 거절을 바라는 제 불안이 있다.

    저는 타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음을 늘 염두해둔다. 

    저는 타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 늘 생각한다.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저의 강박이다. 신뢰를 저버리는 이가 되고 싶지 않아 지키고야 마는 강박. 저버린 신뢰는 때론 배신의 형태를 띄고 저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를 행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저의 약속은 절대적이 되었으나 이를 타인에게까지 강요하진 않는다. 실상 강요할 수 없는 내용이다. 사람이 배신을 한다는 건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고, 그에 저는 신뢰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타인이 해준 약속이란 깨어질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약속을 지킨다면 저는 생각할테다. 아직도?
    약속을 어긴다면 그땐 생각할거다. 결국.

    그리하여 몇 번이고 되물었던 지킬거냔 말은 저의 당연한 의심이고, 아이러니한 모순이다.

     

    "저는 정말, 당신이 무서워요, 벤."

     

    지키지 않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지키기를 바라니 몇 번이고 확인만 반복할 수 밖에.

     

    "당신이 해주는 모든 말들은 다정함에 취하게 만들고,

    저로 하여금 타인을 믿고 싶게 만들어요."

     

    지켜져서 기쁜 약속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내 깨진다할지라도 작은 아쉬움만 남을 뿐 그에 오랜 미련을 가지진 않는다. 제가 받아내는 모든 약속들이 그러하다. 그 약속들에 기뻐하면서도 기대는 하지 않는. 미련을 두지 않은 채 빌려 받은 것에 불과한 타인의 것. 온전한 제 소유가 될 수 없는 말.

     

    그런데 그를 욕심내게 만든다.

    진정 제 것으로 두고 싶다고.

     

    "당신은 그를 지켜야해요.

    내가 결코 내어주지 않으리라 다짐한 것을 가져갔으니까."

     

    뱉어내는 속은 결코 우아하지 않다. 상대는 저를 입 다물게 하는데에도 재능이 있지만, 부끄러운 속을 드러내게 하는데에도 재능이 있어 포장되지도 못한 날 것이 여과없이 쏟아진다. 저는 11살의 언젠가와 다르다 생각했는데, 실상 달라질 것도 없이 다시 추태가 드러낸다. 얼마나 볼썽사나운 꼴일까 생각하면서도,

     

    "몇 번이고 물을테니 평생 제게 증명하세요."

     

    제 입은 멈추지를 못한다. 아니 되려, 제 얼굴을 가렸던 손을 떼어내,

     

    "언젠가 이 약속을 후회한다 해도,"

     

    내어주는 상냥함을 독사와도 같이 움켜잡아,

     

    "이제는 못 물러."

     

    기어코 저의 신뢰를 삼켜낸 이와 마주했다.

     

     

     

     

     

     

     

    제 꼴에 웃음이 났다.

    말 몇 마디에 내어줘버린 신뢰가,

    다정에 기대 억지를 부리는 꼴이,

    추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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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여전히?
    2022. 2. 25. 18:04

     

     

     

     

     

    상냥한 음성이 울린다.

     

    "그야, 네가 그걸 싫어한다고 했으니까." 

     

     

    들려오는 대답에 말을 곧장 잇기보단 그것이 담은 배려를 되새겼다. 들리는 울림이 기분 좋은 건 제게 건네어오는 호의를 알아서다. 이 목소리는 불과 몇 시간 전엔 무례이니 웃지 않겠다며 제게 작은 감동을 줬고, 조금 더 시간을 까마득히 앞당겨보면 볼썽사나운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급한 약속을 했다. 그러고보면 그때의 목소리도 이러했던가? 드는 의문은 다정함 하나는 같았다는 것만 기억한 채 끝이 났다.

     

    다시 대답을 되새겼다. 싫어한다해서 준 약속이라고. 사실 이는 충분한 대답일테다. 답을 해준 벤 모렐에게 있어서.  하지만 그럼에도 답이 되지 못한다. 멜리사 언더힐에게 있어선. 

     

    이 차이는 그가 해준 약속의 의미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있다. 벤 모렐은 모르는 이다. 그리고 멜리사 언더힐은 그동안 설명해주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러니 퍽 의미깊은 약속을 고작 그런 이유로 해줬냐고 말을 할 수 없고 나아가 고작 그런 이유가 아니기도 했다. 벤 모렐은 다정한 성정을 갖췄지만, 적어도 저 약속을 할 적만 하더라도 다정함보단 솔직함이 더 강점인 사람이었다.

     

    "쓰레기라니, 넌 진짜 단어 선택이 좋지 않아."

     

    서로 칭찬과 기분 좋은 말이 오가는 사이지만 처음의 대화 시작은 그러했다. 멜리사 언더힐은 그때의 벤 모렐에게 있어서 좋지 못한 단어 선택을 가진 사람이고, 저는 그를 난데없이 시비를 걸어오는 짜증나는 동급생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어졌던 대답은 나긋한 비아냥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오갔던 대화는 누그러지고 상대는 제게 예외를 만들어준 사람이 되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멜리사.

    그러니 너는 당장이라도, 아니면 그러길 바라는 어느 순간에라도 나한테 소리를 치거나,

    욕을 하거나, 아니면 지팡이를 휘둘러도 돼.

    블러저를 때리듯이 때려도 괜찮아.

     

    네 앞에서는 절대로 문열기 주문을 쓰지 않을게.”

     

    아즈카반에 들어간 부모님은 저를 신경쓰지 않았냐는 말에 난데없이 제가 한 소리는 그래서 문열기 주문이 싫단 말이다. 생뚱맞은 소리에 당황해함이 옳을텐데 상대는 답지 않게 허둥대며 약속을 한다. 그래서 그 약속이 기꺼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해주는 다정함이 기뻐 그 와중에도 약속을 꼭 지켜라 우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내 의아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해준다는 약속이.

     

    그러나 말했듯, 그 의미를 벤 모렐은 모른다. 약속 자체만 보면 크게 어려울 것도 없는 것도 맞다. 고작 문 열기 주문인데. 평생 쓰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고 제 앞에서만 쓰지 않겠다는 거다.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 살아가며 얼마나 있을 것이며 그 순간동안 그 마법을 써야하는 날이 몇 번이나 올 것인지. 그러니, 실상 별 것도 아닌 약속이다. 제게만 의미가 컸을 뿐. 그러니 긴 시간의 침묵과 억지 끝에, 어째서 그 약속이 제게 중요했던지를 꺼내들었다.

     

    "그 주문이 싫은 건,

    부모님께서 저를 두고 가기 위해 썼던 주문이기 때문이랍니다."

     

     제 과거를 이리도 진솔히 꺼낸 적은 처음이다.

     

    "무엇도 모르면서 부모님이 떠날거라는 것 하나만 직감해

    그에 쓴 마법이 문을 닫는 거였어요.

     

    저의 첫 마법이죠."

     

    느릿하게 꺼내드는 말은 평소의 나긋함과는 다르다. 꺼내는 과거에 다시 한 번 제 꼴이 볼썽사나워질까봐, 하나하나 말을 정리하고 감정을 덜어내니 말이 엉성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를 해제하는 등과, 지팡이를 보았답니다."

     

    눈을 감으면 그 등이 드러날 것 같아서, 휘두르는 지팡이의 곡선이 보일 것 같아서 눈은 감지 못한 채 마주해오는 흑빛을 응시했다. 어린 날과 달리 높게 자리한 검정에 시선은 절로 올라가고, 이는 제 감정을 한차례 추스리기 더 편리하게 해준다. 

     

    "가지말란 외침에도, 문을 잠그는 마법에도 돌아보지 않던 등도 싫었지만,

    막았던 문을 활짝 열어버렸던 마법을 볼 때의 기분은 잊을 수 없어요."

     

    첫 마법은 대개 강렬한 마음에서 빚어진다고 한다. 그리하여 저의 마법이 발현되었는데 그를 아무렇지 않게 되돌리던 동작이, 마법이 얼마나,

     

    "그래서 문 열기 주문이 싫어요.

    저의 상실이자, 마법이 이뤄주지 못한 소망이며, 이별이니까요."

     

    얼마나 끔직했는지. 하나로 이름 지을 수 없는 감정들이 한데 얽혀 엉엉 울어버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제야 그 감정들에 이름을 붙인다. 상실감이고, 허무이며, 이별에 대한 슬픔이라고.

     

    그리고 마침내 말을 끝내고나면, 그 옛날과 달리 볼품없이 속을 드러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제대로 말도 못한 채 툭, 이해도 못할 속을 던지고 사라지는 11살은 없고, 일순 크게 들이켜버린 숨이 저조차 몰랐던 긴장을 알려온다. 이내 안도 속에 한숨처럼 뱉어지는 웃음으로,

     

    "그러니, 벤, 당신이 해준 약속은 결코 의미가 작지 않답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약속을 해줬는지 궁금했어요.

    나아가 당신의 호의를 계속 확인하고 묻고 싶었답니다."

     

    솔직하게 약속의 의미를 꺼내드니 이어지는 말들도 쉽다.

     

    저는 여전히 약속을 지킬 수 있냐 물었고, 당연한 일인걸. 약속했던 거니까. 그에 약속했으니 당연하다 말한다. 약속을 했으니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 말조차 기꺼워 웃음은 한숨처럼 흩어지지 못하고 입가에 남는다. 기묘하게도, 상대는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 언제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흘러가는 곳이 아니라서, 문득 치솟는 생각이 있다. 이는 편지를 읽을 때도 느꼈던 것이다.

     

    즐거움에 잔뜩 취해 써내려갔던 편지는 어이없게도 부엉이의 실수에 가지 못한 채 남아버렸다. 이를 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버리지도 못하고 놔두면, 문득문득 기억이 날 때마다 그를 꺼내읽는 제가 있다. 편지를 읽을 때마다 감상은 새로웠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실수라 보낼 수가 없었고,

    이후는 편지를 쓰던 제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가 보여 추억처럼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부터는 문득, 너무 즐거워하던 제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혈통으로 맺은 인연으로 서로가 조심스럽고 맞춰가는 것과 달리 공통된 사고와 생각, 즐거움으로 친해지는 사이는 새로 알게 된 기쁨이다. 그 유쾌함이 강렬해 저는 그 해의 방학 내내 기분에 취해있었고 그것이 편지에 너무도 잘 드러났다. 그를 깨닫고 나면,

     

    "당신은 제 기분을 종일 취한 양 만들어줘요.

    그런데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무서워질 수도 있더군요."

     

    지금도 그렇지 않던가. 더 취하면 곤란할 것 같은데. 벤 모렐은 이번에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고스란히 말해줬고, 그 말대로 곤란해질 것 같은 기분이다. 

     

    "타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음을 늘 염두해두는 편이지만,

    당신은 너무 많은 기쁨을 내어줬고, 그러니 지켜지지 않게 되었을 때

    내겐 그 무엇보다 가장 싫은 게 생겨날거예요."

     

    왜냐면,

     

    "당신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듣고 싶었던 것들 뿐이고,

    당신이 바보같이 굴며 했던 말들 중 기쁘지 않았던 것이 없어서,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고 포장되지 못한 채 꺼내어지는 것들은 진실된 속이고, 그 진심들이 기꺼웠으니 그 호의가 계속 되길 바란다. 번지는 욕심은 다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라, 이번에는 시선을 맞추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상대의 진심을 들여다보려다 되려 이쪽의 날 것의 속만 드러날 것만 같아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것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다. 언제까지고 당신에게 어울릴 것이라 한 장발은 길게 자리해서, 문득 그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언젠가 했던 말처럼 더 이상 작지 않게 된 이는 키 차이가 완연하고, 솔직하고 진솔했던 말은 부드러워져 우아하다. 그럼에도 제게 종종 보이는 제대로 포장되지 못한 날것의 진심이 있어 저를 기껍게 해서,

     

    "그러니 그 주문의 의미를 모두 알려준 지금, 다시 물어볼게요.

    여전히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나요?"

     

     

    욕심투성이의 질문을 다시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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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2. 22. 03:07

     

     

     

     

     

     

     

    말문이 막힌 양 잠시 다물리는 입이 보인다. 

     

    "아직 가지고 있어?

    그럼 언젠가는, 그 편지가 수신인에게 도착하는 날이 올까.

    조금은 기대해도 되려나.

     

    항상 그렇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 말 해줄 때마다 바보같이 굴지 않는 법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

    나도, 지금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1학년이 아닌데도 말이야."

     

    이어 꺼내지는 말은 엉성한 웃음과 함께 했다. 편한 시선, 상냥한 말, 엉성한 웃음. 처음 만났을 적과는 확연히 다른데 지난 날과 다를 것 없는 셋이 제 시선에 박혀든다. 제가 한 말의 무엇이 그를 바보같이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으나 적어도 서로가 함께 보냈던 1학년을 즐겁게 여기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 바보같다는 말과 더불어 엉성해진 웃음을 보고서도 비웃음은 나오지 않는다. 비웃을 수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저에게 와닿는 말이 되었으므로. 

     

    "당신의 것이니 언젠가는 당신에게 갈 편지랍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바보같이 구는 걸 꽤 좋아하는 편이에요.

    저는 칭찬이 아니더라도 와닿는 진심을 좋아하고,

    포장되지 못한만큼 그 속이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포장하는 법을 배웠으면서 퍽 아이러니한 소리를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달가워하게 된다. 상대도 저와 비슷한 교육을 들었으니 낯을 가리고 우아하게 말하는 법을 잘 알텐데도, 그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무엇보다 진심을 확신하게 되어서.

     

    "그러니 아이러니하네요. 그 기억에 취하는 건 저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받은 것들이 더 많으니까요.

     

    방학 전의 당신이 한 약속을 포함해서도 말이죠."

     

    지난 날을 회상할 때 유쾌한 기분에 젖어드는 건 저뿐만이 아니라는 것이 놀랍다. 되짚어보면 늘 저는 받고 있었는데. 사소한 호의부터 배려, 약속까지. 

     

    "저는 그래서 문열기 주문이 싫어요."

     

    별다른 악의도 없는 질문에 저 혼자 볼썽사나운 꼴을 보여줬는데,

     

    “내가 잘못한 거야. 멜리사."

     

    잘못한 일이 없는 이가 잘못을 입에 담았고,

     

    “네 앞에서는 절대로 문열기 주문을 쓰지 않을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을 약속해준다.

     

    어린 날에 보여준 볼썽사나운 모습은 여전히 낯부끄러운데,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해주던 그 약속이 좋아 회상이 어렵지 않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못했다, 하는 말과 함께 제 앞에서 문 여는 마법을 쓰지 않겠다 외쳐주는 이가 생각나고 오랜 시간 이에 대해 묻지 않아준 배려에 대해 새삼 실감했다.

     

    "벤."

     

    여전한 이를, 어린 날과는 다른 호칭으로 불러

     

    "제가 언젠가 그를 싫어한 이유를 설명해주겠다고 했죠."

     

    하나씩, 너무 오랜 시간동안 미뤄왔던 약속들을 지키기로 했다. 

     

    "그 주문이 싫은 이유를 말하기 전에 묻고 싶은게 있어요."

     

    다만 그 전에 듣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은 어째서 그런 약속을 했나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한 터무니없는 약속은,

    당신의 말에 갑자기 얼굴이 엉망이 되는 이를 달래주기 위함이었나요?"

     

    상대가 오랫동안 묻은 것만큼, 저 역시 오랫동안 묻어온 질문을 던졌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은 이가 담은 잘못과, 이어 고마우면서도 제 억지에 맞춰준 터무니없는 약속에 스스로도 어이없어 웃으면서,

     

    "그리고 여전히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나요?"

     

     

     

     

     

     

     

     

     

    (*로그가 아니라 말이! 너무! 길어서! 이렇게 드립니다.....멘답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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