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여전히?
2022. 2. 25. 18:04

 

 

 

 

 

상냥한 음성이 울린다.

 

"그야, 네가 그걸 싫어한다고 했으니까." 

 

 

들려오는 대답에 말을 곧장 잇기보단 그것이 담은 배려를 되새겼다. 들리는 울림이 기분 좋은 건 제게 건네어오는 호의를 알아서다. 이 목소리는 불과 몇 시간 전엔 무례이니 웃지 않겠다며 제게 작은 감동을 줬고, 조금 더 시간을 까마득히 앞당겨보면 볼썽사나운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급한 약속을 했다. 그러고보면 그때의 목소리도 이러했던가? 드는 의문은 다정함 하나는 같았다는 것만 기억한 채 끝이 났다.

 

다시 대답을 되새겼다. 싫어한다해서 준 약속이라고. 사실 이는 충분한 대답일테다. 답을 해준 벤 모렐에게 있어서.  하지만 그럼에도 답이 되지 못한다. 멜리사 언더힐에게 있어선. 

 

이 차이는 그가 해준 약속의 의미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있다. 벤 모렐은 모르는 이다. 그리고 멜리사 언더힐은 그동안 설명해주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러니 퍽 의미깊은 약속을 고작 그런 이유로 해줬냐고 말을 할 수 없고 나아가 고작 그런 이유가 아니기도 했다. 벤 모렐은 다정한 성정을 갖췄지만, 적어도 저 약속을 할 적만 하더라도 다정함보단 솔직함이 더 강점인 사람이었다.

 

"쓰레기라니, 넌 진짜 단어 선택이 좋지 않아."

 

서로 칭찬과 기분 좋은 말이 오가는 사이지만 처음의 대화 시작은 그러했다. 멜리사 언더힐은 그때의 벤 모렐에게 있어서 좋지 못한 단어 선택을 가진 사람이고, 저는 그를 난데없이 시비를 걸어오는 짜증나는 동급생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어졌던 대답은 나긋한 비아냥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오갔던 대화는 누그러지고 상대는 제게 예외를 만들어준 사람이 되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멜리사.

그러니 너는 당장이라도, 아니면 그러길 바라는 어느 순간에라도 나한테 소리를 치거나,

욕을 하거나, 아니면 지팡이를 휘둘러도 돼.

블러저를 때리듯이 때려도 괜찮아.

 

네 앞에서는 절대로 문열기 주문을 쓰지 않을게.”

 

아즈카반에 들어간 부모님은 저를 신경쓰지 않았냐는 말에 난데없이 제가 한 소리는 그래서 문열기 주문이 싫단 말이다. 생뚱맞은 소리에 당황해함이 옳을텐데 상대는 답지 않게 허둥대며 약속을 한다. 그래서 그 약속이 기꺼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해주는 다정함이 기뻐 그 와중에도 약속을 꼭 지켜라 우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내 의아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해준다는 약속이.

 

그러나 말했듯, 그 의미를 벤 모렐은 모른다. 약속 자체만 보면 크게 어려울 것도 없는 것도 맞다. 고작 문 열기 주문인데. 평생 쓰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고 제 앞에서만 쓰지 않겠다는 거다.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 살아가며 얼마나 있을 것이며 그 순간동안 그 마법을 써야하는 날이 몇 번이나 올 것인지. 그러니, 실상 별 것도 아닌 약속이다. 제게만 의미가 컸을 뿐. 그러니 긴 시간의 침묵과 억지 끝에, 어째서 그 약속이 제게 중요했던지를 꺼내들었다.

 

"그 주문이 싫은 건,

부모님께서 저를 두고 가기 위해 썼던 주문이기 때문이랍니다."

 

 제 과거를 이리도 진솔히 꺼낸 적은 처음이다.

 

"무엇도 모르면서 부모님이 떠날거라는 것 하나만 직감해

그에 쓴 마법이 문을 닫는 거였어요.

 

저의 첫 마법이죠."

 

느릿하게 꺼내드는 말은 평소의 나긋함과는 다르다. 꺼내는 과거에 다시 한 번 제 꼴이 볼썽사나워질까봐, 하나하나 말을 정리하고 감정을 덜어내니 말이 엉성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를 해제하는 등과, 지팡이를 보았답니다."

 

눈을 감으면 그 등이 드러날 것 같아서, 휘두르는 지팡이의 곡선이 보일 것 같아서 눈은 감지 못한 채 마주해오는 흑빛을 응시했다. 어린 날과 달리 높게 자리한 검정에 시선은 절로 올라가고, 이는 제 감정을 한차례 추스리기 더 편리하게 해준다. 

 

"가지말란 외침에도, 문을 잠그는 마법에도 돌아보지 않던 등도 싫었지만,

막았던 문을 활짝 열어버렸던 마법을 볼 때의 기분은 잊을 수 없어요."

 

첫 마법은 대개 강렬한 마음에서 빚어진다고 한다. 그리하여 저의 마법이 발현되었는데 그를 아무렇지 않게 되돌리던 동작이, 마법이 얼마나,

 

"그래서 문 열기 주문이 싫어요.

저의 상실이자, 마법이 이뤄주지 못한 소망이며, 이별이니까요."

 

얼마나 끔직했는지. 하나로 이름 지을 수 없는 감정들이 한데 얽혀 엉엉 울어버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제야 그 감정들에 이름을 붙인다. 상실감이고, 허무이며, 이별에 대한 슬픔이라고.

 

그리고 마침내 말을 끝내고나면, 그 옛날과 달리 볼품없이 속을 드러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제대로 말도 못한 채 툭, 이해도 못할 속을 던지고 사라지는 11살은 없고, 일순 크게 들이켜버린 숨이 저조차 몰랐던 긴장을 알려온다. 이내 안도 속에 한숨처럼 뱉어지는 웃음으로,

 

"그러니, 벤, 당신이 해준 약속은 결코 의미가 작지 않답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약속을 해줬는지 궁금했어요.

나아가 당신의 호의를 계속 확인하고 묻고 싶었답니다."

 

솔직하게 약속의 의미를 꺼내드니 이어지는 말들도 쉽다.

 

저는 여전히 약속을 지킬 수 있냐 물었고, 당연한 일인걸. 약속했던 거니까. 그에 약속했으니 당연하다 말한다. 약속을 했으니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 말조차 기꺼워 웃음은 한숨처럼 흩어지지 못하고 입가에 남는다. 기묘하게도, 상대는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 언제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흘러가는 곳이 아니라서, 문득 치솟는 생각이 있다. 이는 편지를 읽을 때도 느꼈던 것이다.

 

즐거움에 잔뜩 취해 써내려갔던 편지는 어이없게도 부엉이의 실수에 가지 못한 채 남아버렸다. 이를 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버리지도 못하고 놔두면, 문득문득 기억이 날 때마다 그를 꺼내읽는 제가 있다. 편지를 읽을 때마다 감상은 새로웠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실수라 보낼 수가 없었고,

이후는 편지를 쓰던 제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가 보여 추억처럼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부터는 문득, 너무 즐거워하던 제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혈통으로 맺은 인연으로 서로가 조심스럽고 맞춰가는 것과 달리 공통된 사고와 생각, 즐거움으로 친해지는 사이는 새로 알게 된 기쁨이다. 그 유쾌함이 강렬해 저는 그 해의 방학 내내 기분에 취해있었고 그것이 편지에 너무도 잘 드러났다. 그를 깨닫고 나면,

 

"당신은 제 기분을 종일 취한 양 만들어줘요.

그런데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무서워질 수도 있더군요."

 

지금도 그렇지 않던가. 더 취하면 곤란할 것 같은데. 벤 모렐은 이번에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고스란히 말해줬고, 그 말대로 곤란해질 것 같은 기분이다. 

 

"타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음을 늘 염두해두는 편이지만,

당신은 너무 많은 기쁨을 내어줬고, 그러니 지켜지지 않게 되었을 때

내겐 그 무엇보다 가장 싫은 게 생겨날거예요."

 

왜냐면,

 

"당신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듣고 싶었던 것들 뿐이고,

당신이 바보같이 굴며 했던 말들 중 기쁘지 않았던 것이 없어서,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고 포장되지 못한 채 꺼내어지는 것들은 진실된 속이고, 그 진심들이 기꺼웠으니 그 호의가 계속 되길 바란다. 번지는 욕심은 다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라, 이번에는 시선을 맞추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상대의 진심을 들여다보려다 되려 이쪽의 날 것의 속만 드러날 것만 같아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것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다. 언제까지고 당신에게 어울릴 것이라 한 장발은 길게 자리해서, 문득 그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언젠가 했던 말처럼 더 이상 작지 않게 된 이는 키 차이가 완연하고, 솔직하고 진솔했던 말은 부드러워져 우아하다. 그럼에도 제게 종종 보이는 제대로 포장되지 못한 날것의 진심이 있어 저를 기껍게 해서,

 

"그러니 그 주문의 의미를 모두 알려준 지금, 다시 물어볼게요.

여전히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나요?"

 

 

욕심투성이의 질문을 다시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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