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
2022. 3. 10. 01:50

 

 

 

 

 

   "제가 할 말을 언제나 당신이 하는군요."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들리는 말은 제가 상대에게 가진 생각이다.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상대를 실망시키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다르기도 해.


   "그리고 저의 아주 부끄러운 치부도 건드리고 말이죠. 맞아요, 당신은 제게 약속을 내어줬답니다. 당신이 허투루 이야기 한 것이 아니며, 제게 내어준 명백한 호의였음에도 그에 불안해한 것은 저죠."

 

나는 비록 목은 아닐지라도 이미 약속이란 이름으로 무언가를 내어줬어. 그건 지금의 솔직함도 포함되는 거고. 그 말에 올라오는 것은 흐릿한 자조다. 상대는 제게 이미 충분한 것을 내어줬는데 거기서 만족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저다. 문득 그 꼴이 제가 말하는 짐승들과도 같은 것 같아 불쾌감이 울컥, 차오르는데 그럼에도 이를 온전히 부정할 수가 없다.

 

저는 귀한 것을 받아놓고서도 그에 만족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안해했으며,

제가 내어줘버릴지도 모를 것과 상대의 것이 가치가 동등하다 여기지 않았으므로.


   "제가 당신의 약속이 불안했던 건 그에 기대고 안주하는 제 자신이 무서웠기 때문이랍니다. 말했듯이 그는 목과 숨통을 내어주는 일이니까요."  

상대가 내어준 약속은 분명 저를 기쁘게 했고, 그로 인해 오랜 시간동안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던 것은 그 약속에 묻혀 흐릿해진다. 언젠가의 상실과 이별이 상냥한 호의로 덮여진다. 무엇 하나 잃게 해주지 않겠다는 말은 가장 최초의 마법부터 상실을 겪게 한 이에게 기쁜 말이다. 나아가 그를 알고 있는 이가 해주는 말이니, 그 다정함이 숨통을 조이도록 좋았다. 그래,

 

  "그런 일은 오지 않을거라고 했나요? 벤, 당신은 어느 정도는 성공했답니다. "

 

목과 숨이 조이도록.

내어줘선 안될 것이 상대의 손에 들렸다.


"왜냐면 나로 하여금 타인을, 당신을 믿어보고 싶게 만들었고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가장 추악한 일면을 드러내게 했잖아요. 당신의 약속에 기뻐 얼토당토 않는 말까지 했었죠."  

몇 마디에 울어버리던 낯, 훗날엔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엉망된 얼굴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상대의 팔을 움켜잡는데 급급했다. 무를 수 없는 약속이라 강요하기 급급했던, 조금도 포장되지 못한 날 것의 속은 추악하기까지 해 오히려 회상 속의 제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말했듯이 그를 받는 것은 나나 당신에게 가장 최악이 될거라 말할거예요. 당신에 대한 실망으로 관계가 쉬이 끊어진다 했나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생각은 제가 했던 거랍니다. 왜냐면 나는 그럼에도 가장 너절한 속을 숨기고 있으니까요."

서로 기대어 지탱하면 되지 않냐, 나도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그 말에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다. 틀릴 것 없는 말이나 동시에 가장 틀린 말이기도 했다. 사람에게 기대어, 목과 숨통을 모두 내어준 자신은 볼썽사납다는 말로 끝날 것이 아니므로.

 

"벤, 숨통을 내어준 이는 언제나 불안해서 상대를 더 옥죌수 있다고, 그리 생각해보진 않았나요? 당신의 속을 언제나 파헤쳐보고 싶고 궁금하지만, 그 전에 제 민낯까지 모두 말해줄게요."

몇 번이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다가 삼켜냈던 것들이 토해내진다. 언제나 말해왔듯, 상대는 제 부끄러운 속을 드러내는데 재능이 있다. 그럼에도 그 꼴이 얼마나 최악일지 알아 삼키기 급급했는데, 결국 끝까지 내몰리고 내몰려 저는 이를 스스로 드러내기로 했다. 우발적이었으나 늘 생각했던 최악이, 드디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기어올라왔다.

 

 "제가 당신이 무섭다 했었죠. 당신은 저의 올곧지도 품위를 갖추지도 못한 모습을 보이게 하기 때문이에요. 자신을 중심 삼아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나로써 존재하고 싶은데, 당신은 사람을 믿어보고 싶어지게 만들었고, 기대하게 만들었답니다. 그에 내어준 신뢰는 저의 가장 큰 후회가 됐어요.

당신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의심스러워진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당신인데 부정적으로만 사고하게 되는거예요. 그 약속을 지키고 있을까, 그저 단순한 흥미로 내어준 건 아니었을까, 지금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의심은 이렇게 끝난답니다. 언젠가... ... 내가 믿고 있는 이로 인해 내 부모꼴이 나버리는 건 아닐까."  

태어난 순간부터 보아왔던 것은 미쳐 울부짖던 부모의 모습이다. 그들이 어떠한 신념과 사상으로 저를 등졌는지 알게 된 것은 먼 친인척의 손에 거둬진 이후였으니, 제가 본 부모는 언제나 미치광이였다. 그들의 광증에 불안해하면서도 떠나보내기는 싫어 잡았던 이는, 마침내 부모가 완전히 제 곁에서 떨어진 이후에야 그들이 미쳐간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마왕에게 충성했고,

마왕은 배신당했다.

 

신뢰라는 것은 가장 날카로운 비도로 위대한 마법사도 죽여버렸고,

제 부모는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어 비참하게 살다 미쳤으니,

신뢰라는 이름은 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부모가 얼마나 뛰어난 마법사였는지, 신념과 순혈의 긍지를 알던 이였다는 것을 들으면 그들에 대한 존경과 함께 자라는 것은 두려움이다. 신뢰는 쉬이 내어줘선 안되고, 사람이란느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언제나 그를 경계해야하는 것이 됐다. 그리하여 저는 결코 내어주지 말고 어둠의 마왕과 부모의 꼴이 나지 말자 다짐했다. 

 

그러했었다.

 

    "이렇게 끔찍할 정도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신뢰인 줄 알았다면 내어주지 말걸. 저는 그렇게 후회했어요. 당신이라는 사람을 그대로 가둬 언제 마법으로 문을 열고 나올까 그를 지켜보면 맘이 편해질 것 같았답니다. 당신이 약속을 어기는 그 순간을 봐야만 할 것 같았죠. 당신이 이를 어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야하는데 자꾸 어길 것 같단 불안이 스물스물 올라오니까요. 우습게도, 당신은 무엇 하나 잘못한 것 없이 호의를 내줬을 뿐인데 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의심하게 되었다는거예요. 하! 미쳐버려도 어떻게 이렇게 미칠 수가 있을까!"

이러하니 터지는 것은 웃음일 수 밖에. 스스로의 모습이 미친 꼴과 다름이 없음을 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약속을 지키고 있냐 확인하고 싶고, 분명 쌓였던 관계는 약속만이 있는 것이 아닌데 제 사고는 편협하게 하나의 불안만 잡고 그에 목을 맸다. 스스로 해결해낼 수 없는 불안이 잠식하고,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열쇠는 타인의 손에 들렸음을 확인할 때마다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다. 이 불안엔 이성도 논리도 없다. 그러니 불안을 제거할 수 없고 남은 것은 그저 외면일 수 밖에. 눈을 감고 애써 무시하고 다른 것으로 모든 관심을 돌려, 

 

   "그래서 당신이 보고 싶고도 보고 싶지 않았답니다. 차라리 아주 먼 이후에 만나 그 약속도 당신에게 모두 빛바래졌을 때 만났으면 했어요. 그렇게 모든 것이 퇴색되고 의미없어졌을 때 만나게 되면 저의 모든 불안이 끝날테니까. 그리고 외면하고 눈돌리고 있으면 당신의 약속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고,"

말했듯이 전혀 멋지지 않은 이유다. 즐거웠던 편지는 끊기고 연락은커녕 소식에서부터도 최대한 눈을 감은 건,

 

"기대를,
제 목과 숨통을,
내어줄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취한 양 이성과 논리가 어그러져 모든게 제멋대로다.

 

   "내어주지 않을거라 했나요? 맞는 말이에요. 내어줘선 안되는거니까요. 그런데 자꾸 당신은 내어주고 싶게끔 만들어요."

 

내어준 신뢰만으로도 저는 이렇게 미치는데 이 얼마나 우스운 소리인지. 스스로도 꺼내 놓은 말이 우스워 소리내 웃어버렸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할 수 밖에요. 당신이 호의를 내어준 이는 사람을 불신하고, 신뢰에 보답할 수 있을지언정 스스로는 신뢰를 걸 수 없는 이랍니다. 차라리 당신이 먼저 그 약속들을 무른다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 옛날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즐거운 대화, 즐거운 관계.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 네, 그렇게요. 혹은, 당신이 먼저 실망해서 떠나는 것도 좋겠죠."

 

언젠가엔 이러한 속에 실망할까봐, 이대로 관계를 뒤트는 것은 저일까봐 두려워 삼켰던 것인데 오랜 시간 잠식했던 불안은 그러한 두려움도 삼켜냈다. 부모의 광증을 닮고 싶지 않아 끊어낸 것들이 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 어느 순간 저는 그를 닮아,

 

   "당신이 내어준 약속과 솔직함에도 저는 이렇게 밖에 답을 할 수가 없으니, 그 체념과 두려움은 당신의 몫이 아니랍니다. "

 

제게 오랜 기쁨을 내어준 관계마저도 스스로 놓게 했다. 상대에게 놓으라 등떠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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