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2022. 2. 28. 03:55

 

 

 

단 맛이 혀끝을 아리게 하고

목을 메이게 해,

그에 숨통이 조이는

 

 

 

 

눈앞의 이를 무어라 정의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처음 마주했던 시선보다 높아진 이가 있다. 높아졌음에도 동등하게 맞춰주는 시선은 내려보는 것이 아니고, 한결같은 호의와 배려가 담긴 채 진솔히 속을 드러내주니 마주하는 것이 즐겁다. 어린 날 언제까지고 어울릴거라 말한 흑빛은 길게 자리했고, 그 날의 말과 다를 것없이 근사하게 어울린다. 직설적인 표현은 우아해졌음에도 여전히 솔직해서, 그 옛날과 아주 많이 달라졌으나 동시에 여전한 사람이다. 한결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갈수록 저는 이를 정의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눈앞의 이는 웃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 제 입가의 호선은 조금씩 줄어든다. 분명 상냥한 말과 음성인데, 저에게 내어주는 호의가 명백한 웃음인데 그를 확인하니 제 가슴 한켠에 무언가 자리한듯 무거워졌다. 지긋하게 내리누르는 것은 아픈 통증은 아니나 버겁다. 저로써는 오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데 내리누르는 무게만큼 쉬이 사라져버릴 것도 아니라서, 결국 감당하지 못한 채 고개가 떨어졌다. 무거워지는 것은 심장이니 그를 감싸듯 어깨는 둥글게 말리고, 제 손은 얼굴을 감쌌다. 

 

무엇도 말을 할 수가 없다.

당혹과, 수치가 아니더라도 입을 다물 수 있음을 상대가 다시 알려준다.

 

“계속해 증명할 수 있는 약속을 다시 할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떤 이유에서든.

설령 네가 곁에 없는 순간이라도 문열기 주문은 쓰지 않을 거야.”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는데 익숙한 사람이 아닌데, 아이러니하게 저는 상대에게는 자주 억지를 부렸다. 무턱대고 약속을 지켜달라했고, 의미도 모른 채 정말 지킬 생각이 있냐 물었고, 의미를 알려주고서도 지킬 수 있냐 재차 물었다. 그 때마다 들려오던 상냥한 대답들은, 어쩌면 그것을 알아 억지를 부렸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와 같은 대답이다. 저에겐 중요한 의미라고, 그러니 진정 약속할 수 있겠냐고, 내어준 것들이 모두 기뻐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다 했는데 상대는 되려 그를 더해준다.


  “가장 싫은 게 생겨나지 않도록, 네가 내게서 잃는 것이 없도록 노력할게.”


내어주는 상냥함이 달다. 그에게서 풍기는 향은 분명 달짝한 것들이 아닌데 하는 말들 중 달지 않은 것들이 없다. 그 말들이 하나의 형태가 되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단 디저트가 되었겠지. 베어무는 것만으로도 혀가 아리고, 텁텁해 목이 메이며, 그러다 못해 숨통까지 조여드는 그런 것. 


 “그래서 언젠가는 네가 문열기 주문을 떠올렸을 때 

상실이나, 이별이 아니라 

기쁨이나 지금의 약속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면 좋겠어.”


그 주문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도 말을 했는데 들리는 말이란. 제 부모가 등돌려 떠난 주문이고, 저의 첫 마법의 실패를 증명하는 주문을 기쁨으로 바꿔주겠다는 말은,

이 얼마나 오만하고,
끔찍하며,
다정한지.

숨이 막혀 말을 할 수가 없다.

당혹과, 수치가 아니더라도 입을 다물 수 있음을 상대가 다시 알려준다.

 

다정함에 기댄 욕심투성이의 질문을 던지면서도 저는 생각했다. 그에 대한 답이 거절이어도 괜찮겠다고. 아니, 어쩌면 가장 바란 것은 거절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없이 했던 약속은 얼굴이 엉망이 된 이를 달래기 위한 말에 불과했을 것이고, 그보다 더 큰 의미이니 겁을 먹고 뒷걸음질칠지도 모른다고. 그리된다면 웃으면서 그동안 지켜준 것으로 충분하니 고맙다해야지. 그런 생각도 있었다. 재차 약속해주길 바라는 욕심과 더불어 거절을 바라는 제 불안이 있다.

저는 타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음을 늘 염두해둔다. 

저는 타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 늘 생각한다.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저의 강박이다. 신뢰를 저버리는 이가 되고 싶지 않아 지키고야 마는 강박. 저버린 신뢰는 때론 배신의 형태를 띄고 저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를 행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저의 약속은 절대적이 되었으나 이를 타인에게까지 강요하진 않는다. 실상 강요할 수 없는 내용이다. 사람이 배신을 한다는 건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고, 그에 저는 신뢰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타인이 해준 약속이란 깨어질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약속을 지킨다면 저는 생각할테다. 아직도?
약속을 어긴다면 그땐 생각할거다. 결국.

그리하여 몇 번이고 되물었던 지킬거냔 말은 저의 당연한 의심이고, 아이러니한 모순이다.

 

"저는 정말, 당신이 무서워요, 벤."

 

지키지 않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지키기를 바라니 몇 번이고 확인만 반복할 수 밖에.

 

"당신이 해주는 모든 말들은 다정함에 취하게 만들고,

저로 하여금 타인을 믿고 싶게 만들어요."

 

지켜져서 기쁜 약속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내 깨진다할지라도 작은 아쉬움만 남을 뿐 그에 오랜 미련을 가지진 않는다. 제가 받아내는 모든 약속들이 그러하다. 그 약속들에 기뻐하면서도 기대는 하지 않는. 미련을 두지 않은 채 빌려 받은 것에 불과한 타인의 것. 온전한 제 소유가 될 수 없는 말.

 

그런데 그를 욕심내게 만든다.

진정 제 것으로 두고 싶다고.

 

"당신은 그를 지켜야해요.

내가 결코 내어주지 않으리라 다짐한 것을 가져갔으니까."

 

뱉어내는 속은 결코 우아하지 않다. 상대는 저를 입 다물게 하는데에도 재능이 있지만, 부끄러운 속을 드러내게 하는데에도 재능이 있어 포장되지도 못한 날 것이 여과없이 쏟아진다. 저는 11살의 언젠가와 다르다 생각했는데, 실상 달라질 것도 없이 다시 추태가 드러낸다. 얼마나 볼썽사나운 꼴일까 생각하면서도,

 

"몇 번이고 물을테니 평생 제게 증명하세요."

 

제 입은 멈추지를 못한다. 아니 되려, 제 얼굴을 가렸던 손을 떼어내,

 

"언젠가 이 약속을 후회한다 해도,"

 

내어주는 상냥함을 독사와도 같이 움켜잡아,

 

"이제는 못 물러."

 

기어코 저의 신뢰를 삼켜낸 이와 마주했다.

 

 

 

 

 

 

 

제 꼴에 웃음이 났다.

말 몇 마디에 내어줘버린 신뢰가,

다정에 기대 억지를 부리는 꼴이,

추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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