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 깃펜은 양피지 위를 유영하지 못했다. 한결같은 일이다. 몇 번이고 책상에 앉아 깃펜을 들지만 펜촉의 잉크가 마르더라도 이를 써내리진 못했다. 수신인을 적는 순간서부터도 그러했다. 그 이름은 이미 익숙한데도.
To. 벤.
그조차 시작하지 못하니 편지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써내리는 말이 어떤 것이든 결국 본론은 그것이다. 여전히 약속을 지키고 있나요? 설령 그 말을 적지 않는다 해도 상대는 제 편지의 의의를 알아차릴테다. 상냥한 이가 귀찮은 기색없이 써줄 답장을 안다. 그것이 언제, 어느 빈도로 오는 편지라 할지라도.
설령 매 시간마다 부엉이가 날아든다하더라도 그러겠지. 질릴 수야 있겠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기로 한 이는 그이지 않던가. 혹은 그게 질려서 약속을 더는 지키고 싶지 않다 항복하는 편지를 받아내도 좋겠지. 그를 생각하면 터지는 것은 웃음이다. 항복이라니. 저는 호의를 받아냈는데 이 약속은 마치 하나의 승부가 되어버린다.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그를 나누는 기준은 이것이다.
약속을 어기는가, 어기지 않는가.
약속을 지키길 바라면서도 저는 이를 생각한다. 언젠가 어겨질 것이라 당연히 사고해버린다. 남에게 받아 빌려쓸 뿐인 약속에 대해서는 언제 깨지던 크게 개의치않았는데 이 약속은 다르다. 제 것으로 받아냈는데 이를 유지하는 건 타인의 몫이다. 거기서부터 불안이 몰려든다. 타인의 것엔 욕심내지 않는데 제 것이니 불안할 수 밖에.
이 모든 것이 문득 멍청하다 생각해서, 어느날부턴 마르는 펜촉을 들고 앉는 일도 없어졌다.
차라리 이대로 멀어져도 좋겠다. 하나에 몰입하고, 어차피 저와 다른 길을 갈 이일테니 소소한 기억과 추억으로 잊혀지는 편이 낫다. 저는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었던가 싶어지고, 그를 자각하면 어이없어 코웃음이 터지는데 그럼에도 저는 무섭다.그래,
벤 모렐은 무척이나, 두려운 사람이다. 날선 적의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은 것이 자꾸만 작아진다.
날선 적의와 악의는 쳐내면 그만이고 뼈를 으스러트릴 쇠공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이 두렵다 생각한 적이 없다. 언젠가에 써내던 과제의 제출처럼 보가트로 써냈던 픽시조차도 사실 귀찮았지 두려운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때에도 그를 적어내면서 보가트로 픽시가 나오는 것은 실상 우습다 생각했다. 저는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도 없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제 보가트가 무엇일지 알 것 같다.
그것은 저의 시신도, 미쳐버린 부모의 모습도, 하다못해 그를 닮은 제 모습도 아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두려움이 확연하다. 진정으로, 어느순간부터, 두려워진 것.
다정함이 독이 될 수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질색해 숨이 막히는 기분.
그는 제게 악의를 가질 사람이 아니다. 저에게 적의를 가질 사람도 아니고 공격할 이도 아니다. 오히려 공격이 들어왔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를 반격하는 법이야 알고 있다. 그것이 가지고 오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니 두렵지 않다. 하지만,
하지만 제 대비와 방벽을 무너트리는 이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 알수가 없다. 그러니 보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을 수 밖에. 사람의 기분을 종일 띄우는 다정함은 그리운 것이나 그것에 흐려지는 제 이성이 무섭다. 그 앞에서 보인 제 추태가 얼마나 되는지 이미 알고 있다. 누구 앞에서 이렇게 무너졌더라면 미친듯이 웃어버렸을텐데. 어떻게 이럴수가.
믿어보겠다 말한 것과 달리 저는 상대를 믿지 못했고,그러니 어떠한 편지도 보내지 않은 채 약속을 외면했다.
... ...
저는, 벤.
당신에게 신뢰를 내어주는 그 순간에도 후회했어요.
내어주는 순간 차오르는 불안감이,
자꾸만 당신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라 확신받고 싶어서,
몇 번이고 매달려서 그를 묻고 확인받고 싶어진다는걸 깨달으니
내가 너무 추악했답니다.
맞아요, 당신에게 목도, 숨통도 내어주지 않을거예요.
신뢰를 주겠다 했으면서도 기대지 않을테죠.
기대는 순간,
스스로 걷고 서는 법을 잊을 것 같거든요.
몇 번이고 들었다 놓은 깃펜은,
당신에게 하루에도 몇통씩 약속을 지켰냐 묻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고
이 불안이 진정될 날을 나도 몰라요.
마법으로만 열 수 있는 방 안에 가둬두고서 당신이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를 확인할거예요
나온다면 결국, 이라 생각할 것이고
여전히 자리한다면 아직도? 라고 생각하겠죠.
진정 당신이 제게 약속을 지켜줄 사람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는 시기가 언제일진 저도 몰라요.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고,
제게 요구하는 것이 없으니,
거래조차 이뤄질 수가 없어서
저는 오로지 당신의 다정함에 기대야 한답니다.
저는 신뢰를 주는 것보다 받고 부응하는게 더 편해요.
나에게 내어준 신뢰는 배신하지 않겠지만 내가 내어준 신뢰는 어떻게 어긋날지 모르는 사람이죠.
만일 당신이 제 목과 숨통을 내어받길 바란다면,
제가 의지하고자 하는 사람이 되고자한다면,
당신도 나를 의지해야해요.
당신도 그에 상응하는 것을 줘야하고,
나에게 바라는 것을 말해야해요.
처음으로 제가 한 말을 어기게 한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도 대단하군요.
저는 당신에게 온전히 신뢰를 내어준게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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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했어요.